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워낭소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늙은 부부와 또한 늙은 소 한 마리가 나오는 영화였다. 특별한 대사도 없고, 다큐멘터리 식으로 엮은 영화였는데, 최근에 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비슷한 영화였다.
그 영화 속의 늙은 아내는 늙은 남편에게 연신을 잔소리를 해대는 여편네로 그려지고 있었다. “기계를 씁시다”, “약을 칩시다”, “이제 늙어서 힘도 쓰지 못하는 저 소를 팝시다”, “우리도 이제 소를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 트랙터로 벼를 벱시다.”
그러나 늙은 남편은 지게를 지다가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질지언정 고집스럽게 기계를 쓰지 않았다. 아내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묵묵히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들녘에 나가 논을 갈고, 밭은 갈았다. 땔 나무를 벨 때로 소를 동무 삼아 나갔다. 그러다가 소를 위해 얼른 꼴을 베다가 먹였다. 그렇게 매일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노인의 일상이었다. 그 모든 일이 힘겨워 보였지만, 그래서 어느 날은 몸져누워 꼼짝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코 스스로 중단하는 일이 없었다.
소 역시 늙었다. 겨우 겨우 한걸음씩 후들거리며 달구지를 끌었다. 엉덩이뼈는 툭 튀어나와 마치 두 산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뒷다리는 어기적거리다 못해 두 다리가 서로 부딪히기도 했다. 이 늙은 소와 늙은 노인은 너무나 닮았다. 억척스럽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모습도 쌍둥이처럼 닮았다. 아니 세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닮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늙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잘못 만나 이렇게 고생을 한다고 투정을 부리는데도 그 투정이 전혀 밉지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 투정부리는 말 속에 잔정이 가득해 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쩌면 그것이 그의 사랑 타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 소는 점점 쇠약해져 가는 처지를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우시장에 팔려고 해도 값을 쳐주지 않아 팔 수도 없다. 급기야 소가 앓아 누웠다. 소는 더 이상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때 할아버지는 낫으로 소에게서 고삐를 베어 빼버렸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유롭게 해주려는 마음인 모양이었다. 고삐에 매달려 있던 워낭도 베어 땅에 던져졌다. 이제 더 이상 소의 존재를 알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마치 저 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처럼 고삐를 풀고, 워낭을 풀어주었을 때, 늙은 소는 벽 사이로 머리를 밖으로 내밀고 한 번 들릴 듯 말 듯 하게 “음메” 하더니 머리를 턱 하고 놓았다. 늙은 소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렀다.
소를 저 세상으로 보낸 늙은 아내가 장작더미를 바라보며 혼자 말했다.
“그래도 소가 많은 일을 했어. 저렇게 많은 나무를 해 놓고 죽었어...”
그 말과 함께 천천히 화면 가득 차 오는 쌓여 있는 나무들... 그것은 늙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늙은 소가 함께 이루어놓은 삶의 흔적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아내와 나는 한참이나 말없이 걸었다. 소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이 자꾸 오버랩 되며 어른 거렸다. 그 영상으로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 앞에 아직도 가야 하는 인생길이 길게 놓여 있었다.
영화 ‘워낭소리’는 제목도 생소했지만, 우선적으로 영화를 만든 이가 경쟁적인 도시적 삶에서 떠나 또 다른 생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다소나마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한 충격은 생명에의 경외였다. 그 영화에서 소는 결코 짐승이 아니었다. 함께 살아가는 식구요, 농사일의 동료요, 함께 늙어가는 친구였던 것이다.
노용찬 목사(라이프호프기독교자살예방센터 공동대표. 빛고을나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