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6] 설교의 정의(定意)를 알면 깊은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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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6] 설교의 정의(定意)를 알면 깊은 고민에 빠진다
  • 정장복 교수
  • 승인 2016.04.0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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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반드시 성령의 감화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명확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 일을 평생 감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고통이다. 뿐만 아니라 그 길은 고단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일을 기꺼이 천직으로 알고 수행할 때, 거기에는 차원이 다른 결과들이 발생된다. 확고한 신념이 세워지고 생산적인 발전의 에너지가 생성된다. 사명의식이 고취되고 방향설정이 뚜렷해진다. 그 사명의식은 언제나 창조적이고 무한한 책임감이 몸에 배게 된다.

이 강의에서 선결되어야 할 과제는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사역에 관한 정확한 정의를 터득하고, 오늘 그 막중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질문에 ‘설교란 하나님 말씀의 전달’이라는 통념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설교의 정의는 그렇게 단순하게 답할 것이 아니다. 좀 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설교에 대한 정의를 많은 신조나 학자들이 단편적으로 말하는 바가 많다. 말씀의 복원을 위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개혁자들로부터 현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설교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제네바 신조(1536)에서는 목사의 권위란 “말씀을 자신들의 개인적인 생각과 혼합하지 않고 순수하게 전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인정 여부가 결정된다”고 하였다. 이 신조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칼빈은 설교자를 ‘말씀의 전권대사’로 칭하면서 설교란 “하나님이 예배현장에 임하시어 그 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언급은 설교 그 자체의 정의보다는 설교라는 무거운 사역에 몸담게 되는 사역자에 관하여 깊은 우려와 함께 그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1644)에서는 설교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사역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일에 해당하는 사역”으로 규정하면서 여러 항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교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은 칼 바르트는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인간(설교인)을 선택하고 성경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인간들에게 증거하게 하신다”는 매우 종합적인 설교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와 같은 미국 성공회의 대표적인 설교자는 “설교란 한 사람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대단히 함축적인 정의를 내린바 있다.

필자는 이상의 내용들을 참고하여 종합적인 설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설교란 택함받은 설교자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이 진리를 회중의 삶에 적용하는 사역이다. 이것은 반드시 성령님의 감화하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정의를 설교자가 수용한다면 여기에 주어지는 중요한 질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는 나는 택함 받은 설교자인가? 나를 택하신 분이 만족하리만큼 나의 최선은 실천되고 있는가? 둘째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66권의 성경말씀과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 나는 그 말씀을 올곧게 선포하고, 그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을 내가 섬기는 양들의 삶에 효율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는가? 셋째는, 나의 표현과 전달 방법이 오늘을 사는 회중에게 막힘이 없이 소통이 되고 있는가? 넷째는, 나의 이 모든 준비와 외침이 성령님의 역동적인 역사 아래서(Under Dynamic of Holy Spirit) 실행되고 있는가?

설교는 고유한 사역이다. 세상의 모든 직업은 인간사회에서 인간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특수한 사명이 주어진 사역이다. 설교자는 인간으로, 인간을 상대하면서 전개하는 직업인이지만 여기에는 초월자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여 그분의 뜻을 펼치는데 모든 목적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설교자는 언제나 인간을 바라보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진솔한 자기진단을 이어가야 한다. 위에서 제시한 네 가지의 기본적인 질문은 설교자를 평안하게 해주는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들은 설교자가 언제나 가슴에 품고 정답을 찾기 위하여 고민하고 애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항목들이다. 이러한 설교자는 진정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고 있는 말씀의 종이다. 이와 같이 깊은 자기 점검의 질문들을 쉼 없이 이어가는 말씀의 종에게는 성령님이 두루마기를 입혀 성언운반일념의 ‘에토스(ethos)’가 박힌 말씀의 도구로서 그의 백성들 앞에 서게 하신다.

설교의 정의를 바르게 작성하기 위하여 개혁자들이 남긴 신조를 펼쳐 보면서, 그들이 철저히 강조했던 것은, 어떻게 설교하느냐는 문제보다 어떤 인간이 설교자로 바르게 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최근의 설교학 교육이나 설교자들은 유창한 언변과 흥미진진한 전개를 비롯하여,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능숙하게 움직이느냐에 설교의 성패를 가름하고 있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기본 정신에 어긋나는 방법들이다. 이제 제시된 종합적인 설교의 정의를 다시 보면서 거기에 오늘의 한국교회 강단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한국교회의 설교사역에 문제가 산적해 있음을 곧 알게 되고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장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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