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8] 설교의 위기요소들이 도처에서 보인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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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8] 설교의 위기요소들이 도처에서 보인다(2)
  • 정장복 교수
  • 승인 2016.04.2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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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절과 설교자의 언행불일치에 회중은 냉담해져
▲ 정장복 교수

지난 제7강의에서 열거했던 설교사역의 부정적 요소들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이었다. 설교 일변도의 목회 현장이나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종교문화를 비롯하여, 설교학 교육의 부재가 길었던 신학교육은 설교자에게만 탓을 돌릴 수 없는 문제이다. 이에 더하여 교인들의 맹종만을 요구했던 설교자들의 그릇된 생각과, 말씀의 순수한 운반자가 아닌 지배자로서의 설교 관습은, 전래해온 설교 풍토의 단면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들이 설교의 전통으로 한 세기를 넘게 자리잡아 왔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설교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목양 되어지는 길로 새롭게 바꾸어 나아가야 함이 우리 한국교회의 중요하고도 총체적인 과제라 하겠다. 이러한 무거운 과제를 안고 고민하는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시급하게 찾아온 또 다른 무거운 주문들이 일찍부터 쇄도하고 있다. 이 주문은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강단을 쳐다보고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온 회중들로부터 들려온 것들이다. 그들이 진솔하게 호소한 말을 들으면서 틸리케(Helmut Thielicke)가 “오늘날의 설교는 이제 임종의 단계에 왔을 정도로

쇠하고 붕괴되었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진정 설교를 ‘임종의 단계’로 몰고 가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 회중들은 설교를 목회의 방편으로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목사의 직무는 설교가 전부가 아니다. 목회라는 사역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고 그들을 섬기는 데 있다. 작은 결정이라도 교인들의 의사를 존중해야한다. 개신교는 천주교처럼 중앙집권제가 아닌 개교회가 중심이 된 조직 사회이다. 그 결과 많은 부분에서 목회자와 불편한 관계에 직면할 때가 많다. 그 때마다 목회자의 불만은 쌓이게 되고 이 불만은 설교를 통하여 분출되기도 한다.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받고 자신의 분노를 설교에서 그대로 표출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설교가 아니다. 자신의 의견에 대한 정당성과 불만을 성경 말씀을 내세워 토하는 인간감정의 발로이다. 여기에 우리의 교인들은 고개를 저으며 “제발 그것만은 삼가 달라”는 주문을 한다.

둘째, 회중들은 설교자가 자신이 외치는 메시지를 먼저 실천해주기를 바란다. 가까운 의사친구가 “의사의 말을 따르면 살고 행동을 따르면 죽는다”는 말을 들려 준 적이 있다. 목사의 탈선이 보도될 때마다 이 말이 떠오른다. 우리의 사회는 어느 나라보다 성직자의 높은 도덕률을 요구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설교자가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자신이 외치는 설교의 내용대로 살지 못하는 부분이다. 자신이 외친 메시지와 실천의 불일치 문제이다. 회중들은 설교자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 일상생활까지 주시를 하면서 실망을 거듭하고 있다는 푸념이다. 설교의 은혜와 능력은 언제나 설교자가 ‘언행의 불일치’를 보편화 시킬 때 쉽게 무너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셋째, 회중들은 복사한 설교 앞에 차가운 눈길을 보내며 반기를 들고 있다. 설교의 표절 또는 복사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최초의 설교학 교수 어거스틴이 430년에 죽은 이후 ‘설교의 암흑기’는 바로 도래하였다. 설교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당시의 신부들은 크리소스톰을 비롯한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그대로 복사해와 그것을 읽고 있었다. 그 결과 설교의 암흑기가 찾아왔고 사회는 바로 중세의 암흑기로 이어졌다. 지금 우리나라는 IT 천국이다. 인터넷은 가장 보편화된 첨단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대중교통뿐만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이면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인터넷 바다를 만끽한다. 이러한 생활 패턴은 자기 교회 목사의 설교가 누구의 설교에서 표절, 또는 아예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많은 평신도들이 그 실상을 복사해 보여주면서 “이래도 됩니까?”하는 질문을 던진다. 남의 설교의 표절 또는 복사는 불량한 양심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설교

능력의 향상을 사장시키는 행위이다. 그리고 생명력이 없는 메시지의 공급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넷째, 회중들은 ‘아멘’의 강요에 시달리고 있다는 호소를 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아멘의 풍경’이 오순절 계열의 교회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급속히 확산된 바가 있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고 배우고 연구하는 말씀 중심의 교단이었다. 설교 시간이면 정숙한 자세로 말씀을 경청하고, 감동이 넘치는 은혜의 순간에는 아멘의 함성보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곤 했다. 요즈음 정신을 차리고 아멘의 함성을 강요하는 설교자를 보고 있노라면 두려움이 앞선다. 메시지의 내용보다는 ‘축원합니다’ ‘믿습니다’를 특유한 음정으로 띄워 아멘을 유발하고 그것을 설교에 대한 감격적인 응답으로 간주하는 모습은 분명코 바른 길이 아니다. 성숙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설교자의 고수로서 ‘아멘’으로 응답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낌없는 아멘의 함성을 지르고 싶어한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건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가 적시어 있는 교회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고 온전하게 전파되는 데에 독소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성전에 잡다한 상인들에게 채찍을 들었던 우리 예수님의 노여움이 한국교회에 내려지지 않도록, 이제는 일어서서 설교사역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세속화의 해일이 교회로 밀려오는 지금, 말씀의 종들이 진단과 처방의 손길을 서둘러야 한국교회가 미래를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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