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음악, 여전히 ‘초록불’ 정주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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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음악, 여전히 ‘초록불’ 정주행 중
  • 김목화 기자
  • 승인 2015.09.08 2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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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기자모임 CC+ 2015 정기 세미나 ‘교회음악의 경계를 논하다’
▲ 이미 해외에서는 EDM 워십이 자리잡고 있다. 위 사진은 세계적인 예배팀 힐송의 여름캠프 현황. 젊은이들이 클럽 분위기의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사가 담긴 비트있는 찬양으로 환호하고 있다. 출처=유튜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어 어떤 방법으로, 장르의 어느 부분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고전적인 음악 장르나, 정통 찬송 기법으로만 하나님께 찬양해야 하는 걸까.

최근 한국기독학생회(IVF) 전국 리더대회에서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무대가 EDM(Electronic Dance Music)으로 진행되어 논란이 일었다. 세속적이고 소위 저급 문화라고 평가받는 클럽 음악에서 주로 쓰이는 EDM이 예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란에 대해 한국크리스천기자협회 언론사 소속 문화기자모임 CC+(Christian Culture Plus)가 ‘EDM 논란으로 본 교회음악의 경계(교회에 맞는 음악이 따로 있나요?)’를 주제로 2015 하반기 세미나를 열었다. 지난 3일 서울 합정동 노리터플레이스에서 열린 CC+ 세미나에는 빅퍼즐문화연구소 윤영훈 소장(명지대 겸임교수)과 예배사역연구소 이유정 대표(미국 리버티대 예배학 한국디렉터), 김재욱 목사(문화행동 바람 대표)가 나섰다.

▲ 윤영훈 교수

어떠한 논란이든지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기보다는 논란거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다. 세미나에서는 ‘EDM 워십 논란’에 있서 EDM 장르가 예배음악에 있어 비판 받아야 하는 음악인지, 도대체 EDM은 어떤 음악인지에 대해 윤영훈 소장이 설명했다.

일반 대중음악계에서도 대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EDM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그 영향력에 비해 주류음악으로 편입된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윤영훈 소장은 “1990년대 일어난 일렉트로닉 혁명은 신디사이저의 발명에서 시작되는데, 디지털피아노, 디지털드럼, 미디(MIDI) 장치가 발전하면서 EDM 문화가 확산되었다”고 설명했다. 즉 아나로그 음 신호를 컴퓨터로 디지털화해 저장하고 반복적으로 추출해 쓸 수 있게 되면서 음악 산업의 혁명이 지대하게 일어난 것이다.

EDM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원은 댄스 클럽과 DJ가 주도하는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디스코 열풍은 클럽 문화를 확산시켰다. 기존 아티스트의 무대공연이 아니라 DJ의 선곡과 재생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클럽에서 EDM은 클럽 DJ들이 새로운 음악을 재창조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즉 DJ는 기존 음악을 틀어 줄 뿐 아니라 EDM의 특성인 ‘Cut and Mix’(자르고 재구성하기)를 통해 음악을 재구성하는 새로운 유형의 연주로 부각된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유럽 클럽문화에서 독보적이었고 자연스레 유럽에서부터 전 세계적으로 EDM 열풍은 이어져갔다. 이러한 클럽문화는 청년 하위문화로서 굳어져갔다.

비슷한 예로 1980년대부터 일어났던 ‘CCM 부흥’ 역시 교회 안의 청년 하위문화였다. ‘경배와 찬양’ 운동은 기존의 장년 세대의 공예배 시스템과 구별되어 드려진 초교파적인 청년 자발적 예배 운동이었다. 윤영훈 소장은 “1980년대 말부터 많은 젊은이들은 매주 목요일 또는 화요일 저녁에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가 아닌 각자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경건한 ‘클럽’으로 찾아갔다”며 “교회의 젊은이들은 당시 찬양예배에 함께 참여한 또래들과 정체성을 공유하며 찬양 가운데 상호 간의 축복과 교제의 시간을 나누었다”고 설명했다. 장년들에게는 매우 어색했지만, 젊은이들에게 당시 초교파적인 찬양예배들은 매우 중요한 예배였다.

양면적인 교회의 모습은 언제나 늘 존재했다. 복음주의 기독 청년들 역시 동시대의 대중음악과 청년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청년’의 형식에 있어 세속 음악과 문화를 민감하게 수용했지만, 동시에 ‘복음주의자’로서 청년들은 가치관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면적인 긴장 속에 당대 청년들은 그들만의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교회 안에서 대안적 음악문화를 창조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수용되는 음악 장르는 어디까지인지 논쟁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다. 기독교는 당대 문화양식을 적극 수용했지만, 그 당대 문화에 대해 늘 부정적인 평가와 함께 신학적으로 정죄해왔다. 윤영훈 소장은 “무엇이든지 기독교 정체성과 타문화가 융합할 때는 두가지 정체성 모두가 다 양립해야 한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에 치우치거나 흡수되는 혼합주의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며 “EDM 워십은 문화적 혼합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많지만, 오히려 새로운 예배에 창의적 논의와 관심을 이끄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CCM과 모던워십은 청년 크리스천들의 자생적 문화와 예배 운동으로 태동하고 발전했다. 많은 논쟁 가운데서도 CCM과 모던워십은 신학적 논의를 통해 정당화되었다기보다는 실용적인 목회적 관점에서 수용됐다. 특히 예배에 있어 예배학적 연구와 갱신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즉 EDM 논란은 EDM 워십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 현대문화 속 건강한 예배신학 정립을 위해서도 계속될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인 반대보다 세상 문화를 교회 안에서 새롭게 재정립해 나가거나, 오히려 재정립된 EDM 워십을 통해 믿지 않는 청년들을 교회로 이끄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연구도 필요하다.

교회 내 음악 분쟁 및 논란은 16세기에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 악기 사용을 금지했던 칼빈(John Calvin)은 “공중 기도에는 말로 하는 기도와 노래로 하는 기도가 있다”며 “말씀을 실을 수 없기 때문에 악기는 교회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이유로 다성부(多聲部) 합창음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는 오직 단성부(單聲部) 음악만 허락했다. 게다가 새로운 음악을 시편 가사에 붙이는 것은 장려했지만 새로운 작사는 금지하였다.

반면 루터(Martin Luther)는 교회에서 음악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았다. 또 기악의 사용을 장려했다. 새로 작사된 가사와 세속음악이라도 교회적 가사로 개작된 것도 허락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학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음악을 경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성경의 시편을 살펴보아도 다윗은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흔히들 CCM의 현주소에 대해 “힘들다”고 말한다.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 분야인데다가 기독교인들조차도 관심이 적다는 판단에서다. 실상 말하자면 CCM에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찬양사역자들은 사업의식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수익을 목적으로 무대에 나서지도 않는 ‘재능기부자’에 가깝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맹목적인 이유로 CCM에 뛰어들어 찬양사역자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목사가 뜻을 받아 교회를 개척하듯이, 찬양사역자 또한 뜻을 받아 무대를 개척해나가는 셈이다. 여기에 있어 EDM 장르를 끌어와 기독교 문화로 정착하려 한다면 보다 성숙한 시각이 필요하다.

윤영훈 소장은 “기독교 EDM은 청년문화의 양면성을 잘 반영해 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의 상업화된 주류문화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반영하며 새로운 문화적 대안을 제시했지만, 역사적으로 청년문화는 일탈과 방탕이라는 쾌락주의적 이면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EDM을 건강한 예배문화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청년문화의 창의성과 공동체 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면서도, 쾌락주의적 감상주의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 지난 3일 열린 CC+ 정기세미나에서 문화기자들은 EDM 논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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