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권의 문화칼럼] 맹인들의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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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의 문화칼럼] 맹인들의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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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0.1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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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권의 기독교미술 간파하기 (21)
▲ 브뤼겔, '맹인들의 우화', 캔버스에 템페라,86X154Cm.

지금 사회는 온통 O, X 문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인 듯하다. 어느 것이나 사실이 사실임에도 그 사실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혼외자 문제, NLL 발언, 북핵문제 등이 그것이며 일본의 근대사 억지 주장이 그렇다. 모두 자기 입장에서 이해득실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기억한다거나 그렇다고 믿는 것이기에 셜록홈즈가 와도 풀 수 없을 것이다. 답은 둘 중 하나임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요한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감각이 둔화된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난 역사적인 사건이 되면 진실 공방이 벌어진다. 이렇게 우리들 대부분은 역사를 볼 때 그 사실과 진실이란 측면에서 각자의 관점을 가지고 담론하고 있을 뿐 그것을 실증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그렇게 인간들의 논리나 인간의 지식에 의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받은 체험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하는 간증 집회에서도 그러한 체험이 없는 이는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제자들의 간증을 믿지 못한 도마처럼, 그리고 그와 같은 체험을 한 그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지 않는 군중들처럼 말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보는 자와 볼 수 없는 자로 대별할 수 있다. 즉 눈 먼 자와 눈뜬 자로 말이다. 매우 적합한 작품이 있어 소개한다. 르네상스시대의 브뢰헬(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의 ‘맹인들의 우화’다. 보통 농민화가, 혹은 풍자화가로 알려진 브뢰헬은 가톨릭 신자로, 종교개혁을 지지했다거나 그렇지 않았다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작품의 원전인 마태복음 15장 14절이나 누가복음 6장 39절의 말씀 그대로 말이다. 이 작품의 작가도 상대를 비난하기위하여 제작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생각으로 말씀에 충실하여 제작하였을 것이다. 대개의 예술가, 특히 브뢰헬 정도의 수준인 작가는 상대를 비난하기 위하여 제작하지 않는다. 단지 그 작품을 보는 이들이 자기의 수준에 따라 그렇게 악용한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세 사람들이 그럴 것으로 믿는, 참으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현장을 재현하는 것이리라.

앞에 말한 것처럼 어느 것 하나 그 사실을 증명하기 어렵다. 지도자들 대부분은 자기의 입장에서 사실을 보고 해석한다. 나아가 신의 영역까지 물질로 보고 그 유, 무를 증명하려할 뿐만 아니라 아예 신은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마치 물리학 이론을 수많은 실험을 통하여 증명한 것처럼. 우리는 또다시 범죄하고 있다. 내가 최고인 것으로 착각하며 교만하고 나아가 신의 영역에 들어서 자신이 신인 것처럼. 톨스토이까지 가지 않아도 인간은 한치 앞도 못 보는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임에도 말이다. 우리 스스로가 맹인인 것을 모르고 말이다.

이제 우리 같은 맹인은 코끼리를 만질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지고 제각각 다른 주님의 모습을 이야기해야겠다. 필자는 얼마 전부터 인간이 가진 능력은 오직 하나, 기도할 수 있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급하고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기도하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을 시간은 있음을 말이다.

필자가 자녀를 위하여 그들에게 그려준 그림에 이렇게 썼다.

“인간의 능력? 오직하나 기도할 수 있는 것.”, “급해? 기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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