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명절 ‘종교개혁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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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명절 ‘종교개혁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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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9.2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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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 목사 / 거룩한빛광성교회

무더웠던 여름이 어느새 지나가고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지난 지금, 우리는 새로운 ‘명절’을 기다린다. 바로 ‘종교개혁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명절이다.

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은 마르틴 루터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용기와 능력으로 이같이 큰 일이 이뤄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물론 그는 존경 받아야할 위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보다 앞서 일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신 것을 알아야 한다.

루터 당시 유럽의 교회를 다스리던 자는 교황 레오 10세(재위:1513~1521)였다. 그가 교황에 오를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극심한 혼란 가운데 있었다. 바로 교황과 프랑스 왕의 대립 때문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통솔한 강력한 군대와 정치력을 원했던 알렉산드로 6세는, 이탈리아 반도로 세력을 넓히고자 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와 강하게 대립했다.

1503년,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율리우스 2세 또한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적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프랑스 세력과 대립했다.

율리우스 2세 다음으로 교황좌에 오른 레오 10세는,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남쪽에는 에스파냐가 호시탐탐 이탈리아 반도를 노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1515년 8월, 막 20대의 젊은 나이에 프랑스의 왕좌에 오른 프랑수아 1세는 3만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당시 최강이라 불리던 스위스 보병을 무찌르고 같은 해 12월 11일, 승리자의 자격으로 레오10세를 볼로냐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517년 4월, 교황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추기경들 사이에서 일어나 로마를 들끓게 하였다. 바로 이 해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해이다.

1517년 11월 이후, 독일의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사상에 대해 이단판정을 내려달라는 공문을 로마에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러나 로마는 그 답장에 무려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이 사이 루터의 이름은 독일 전역에 퍼졌고 이미 불이 붙은 종교개혁 운동은 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왜 로마는 루터의 이단 판정에 이토록 많은 시간이 걸려버렸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는 교황의 파문칙서를 찢고 불태웠음에도, 그보다 앞선 위클리프나 후스와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있었을까? 바로 위와 같은 국제정세 때문이다.

즉 로마교황은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그 작은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로 인해, 루터는 종교개혁 사상의 기초를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고, 작센 선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독일서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루터 개인의 탁월한 영성이나 지도력을 사용하셔서 이 큰 일을 이루신 것이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꼼꼼하고도 세밀한 안배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신 것이다.

역사 속에서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이 온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당신께서 직접 계획하시고 일하신다. 우리는 그 분의 사역에 동참할 뿐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역이, 선교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을 때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지금 나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에, 당신의 뜻에 따라서 이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어둠과 같은 컴컴한 터널을 지날지라도 낙심치 않으시길 바란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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