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역사 비판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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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역사 비판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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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4.1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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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 엽 / 기독교정화운동 대표

요새 신사도 운동에 대하여 많은 의혹과 더불어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비판을 책자로 출판 된 것도 여럿 있다. 나는 그 비판하는 책자들을 살펴보고 놀랐고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읽다가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괄적으로 처음에는 저자가 의혹을 제기 하다가 어느새 완전히 정죄의 화신이 되어서 독자로 하여금 자기 확신에 동참하는 자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자는 처음에는 신사도 운동은 성경적이 아니다 정통신학적이 아니다 하다가 어느새 이것은 완전히 마귀의 짓이다라고 단정 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마귀의 짓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태도에서 과연 건전하고 정당한 비판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신사도 운동이 어떻게 복음적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틀렸다는 정당한 이유와 이론을 전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판단 할 수 있도록 해주었어야 한다.

나는 아직 신사도 운동에 대하여 연구 해 보거나 논의 해 본적은 없지만 영적으로는 그다지 틀린 것이 없어 보인다. 다만 “신사도 직임의 남용되는 일 만큼은 재고해야 되지 않을까”하는 의문은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도 직임 재 사용 문제가 그렇게도 비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는 따로 학자들이 연구해 보고 토론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해 보지만 은혜 충만하여 주님께서 직접 임명하시고 보내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바울 같은 경우를 생각 해 본다면 어떨까?

어쨌든 읽어 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눈멀고 벙어리 되게 한 귀신을 내 보냈을 때 서기관들은 자기들 끼리 바알새불(똥무더기의 주인)을 힘입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는 편견어린 비판을 했을 때 그들을 책망하는 기사를 성경에서 읽어보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편견에서 그 사건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편견은 영적으로 아주 어두운 눈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는 판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영적 현실들을 비판 할 때에는 먼저 영적 지식과 경험이 축적 된 후에 해야 되리라고 생각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으로 귀신 역사로 인식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에도 제자들은 유령인줄로 알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이유는 떡 다섯 덩이로 5,000명을 먹이시던 하나님의 큰 능력 역사를 바람과 물결로 그 마음들이 둔해져서 그리스도를 오해했기 때문이었다고 마가복음에서는 해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체험을 한 사람들도 잘 못하면 정죄의 반열에 들어 갈 수 있다. 기도하지 않고 다 안다는 식의 교만에 빠질 때 삽시간에 마귀의 궤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손 같은 경우는 성령 충만 후에도 결국 드릴라라는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잡혀 두 눈이 빠지지 않았던가? 이렇게 어두어진 후에 정죄의 반열에 들어가면 두려움도 생길 수 있다. 성령을 정죄한 자는 영원히 용서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죄 할 때의 두려움은 은사중지론 속으로 도피 해 버린다. 워필드의 은사종결론으로 도피하면 안전하고 정죄를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은사 종결론이 힘을 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그늘에서 활개를 쳐 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은사 비판론자나 찬성론자가 다 같이 어떻게 하면 더 성경적이고 더 신학적으로 올바른 신앙 노선을 구축할까 하는 우려에서 논의 하는 줄로 알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앞으로 영적 신앙 발전에도 리더십을 구축하려면 좀 더 성숙한 태도로 논의들을 진행하여야 하리라고 본다. 무조건 정죄하거나 무조건 반대를 해서도 안되고 그리스도께서 내어 놓고 공정하게 말했다는 말씀처럼 공공연하게 정직하게 논의해야 발전 할 수 있다.

※위 내용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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