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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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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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8.17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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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 (예수로교회)

육책(六責)우천리(雨天里)란 말이 있다. 중국 고대 은나라의 탕왕 때 7년에 걸친 큰 가뭄이 있었는데 왕이 6가지의 죄과를 자책하며 하늘에 고하자 비를 천리에 내리셨다는 고사다.

동양의 제왕들은 나라의 변고가 생기면 그것을 하늘의 진노로 생각하고 자기의 소위를 살펴 자신의 부덕을 자책하고 하늘의 뜻을 물어 정사를 바로 하였다.
 
육책(六責)이란 6가지 책임을 말한다. 정치하면서 절약하지 않았는가. 백성이 직업을 잃지 않았는가. 궁실은 엄숙한가. 여자의 청이 너무 많지 않았나. 뇌물이 행해지는 것은 아닌가. 참소하는 이가 많지 않은가.

이는 오늘날 우리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민심이 하늘문을 열었나 보다. 백년만의 기록적인 집중호우와 이어진 태풍으로 서울의 도심이 잠기고 곳곳에 산사태가 나고 전국이 지루한 장마 권에 접어들면서 곳곳에 농경지가 유실되고 밭농사가 실농을 했다.

미국 발 경제위기가 물가의 폭등과 주가의 폭락을 가져오고 유럽의 재정위기는 세계경제의 화약고가 되었다. 대외변수에 취약한 한국 경제는 더블딥의 늪으로 심각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갑론을박 표심 따라 움직이는 얄팍한 위정자들의 움직임에는, 어느 하나 국민에 대한 염치나 하늘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 폭우 폭풍, 폭등 폭락, 우울한 휴가철이다.

한편 얼마 전 세계를 경악시켰던 사상 최악의 충격적인 테러의 현장인 노르웨이에서는 긴급구조대와 경찰, 소방관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오슬러브(Oslove)콘서트가 열려 지구촌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오슬러브(Oslove)란 수도 오슬로(Oslo)와 사랑을 뜻하는 러브(love)의 합성어로 비통에 잠긴 국민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광란의 테러에 분노를 표출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누군가 살아남은 이들을 위해, 서로에게 관용과 사랑으로 평화와 화합을 다짐하며, 오슬로 대성당에 이어진 수많은 오슬러브 장미의 물결들을 눈여겨 볼 일이다. 새로운 지평(New Horizons)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슬로건이다.

새로운 지평은 구호로 열리는게 아니다. 각고의 노력과 인내 그리고 모두의 눈물어린 수고와 투자로 이루어진다. 속도보다 중요한건 방향이다.

스펙(Spec)보다 중요한건 스피릿(Sprit)이다. 치수 (治水)는 치산(治山)이 먼저다. 편법이 정당화되면 와우아파는 무너지고, 빈부의 균형이 깨지면 삼풍백화점은 붕괴되고, 계층 간의 소통이 막히면 성수대교는 내려앉기 마련이다.

도시를 성형(成形)해서 행복도시가 되는게 아니고,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노사갈등이 봉합되는게 아니다. 모라토리엄 인간들이(Moratorium man) 사회각계각층에 도사리고 있는 한 새로운 지평은 요원해진다.

이제 우리는 8.15광복 66주년을 보내고 있다. 팽배해진 계층 간의 불신과 갈등을 관용과 화합으로 아우르지 않으면 인재(人災)가 천재(天災)가 되고 재해가 재앙으로 반복 확산된다. 나라가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민심이 이반되고 자연이 다스림을 거부한다.

반복되는 역사의 현장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메시지가 스며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에서 공생 발전(Ecosystemic Development)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때이다. 교회는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다.

교회가 세상에 할 말이 없으면 공의는 무너지고 강단이 십자가의 복음을 주저하면 세상에 밀린다. 역청을 발라 세속의 파도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말씀의 고삐를 잡고 생수의 물꼬를 트고 십자가를 바라보자(민21:9).

어제 우리가 방치한 즐비한 십자가들이 오늘 우리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말씀을 붙들면 새로운 지평은 열린다. 서두르면 이스마엘이고 기다리면 이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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