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매일 2.2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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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매일 2.2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1.08.1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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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의 교회 성장, 과연 어땠나?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교회성장 원인 분석
카리스마적 목회리더십-근대화-도시화 수용하며 급성장

한국 교회가 첫 번째 대 성장기 이후 206.9%의 기록할만한 성장세를 나타냈던 때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 이렇다 할 관계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박 정권 시대는 한국 교회가 양적인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성장한 ‘매우 특별한 시기’였다.

바로 1960년대와 1970년대. 첫 번째 대 성장이 있었던 1900년대에 이어 해방 이후 또 다시 맛본 성장기였다. 1차 대 성장의 기간 동안 증가한 신자 수의 비율은 659.1%. 2차 성장기인 1960년부터 1969년까지는 206.9%, 1969년부터 1980년까지는 124.9%가 성장하는 기록을 보였다. 이런 급격한 교회 성장에 대해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최근 세미나를 열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최동규 교수(서울신대 교회성장학)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으로부터 촉발된 부흥의 물결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정점으로 전국에 퍼짐으로써 일어난 현상”으로 보았다. 이와 함께 교회와 목회자들의 수 또한 함께 증가했다. 1960~1970년대까지 교회 수는 약 3.6배, 목회자 수는 약 1.4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2.2개의 교회가 새로 생겨난 상황으로, 그 부흥의 속도가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신자의 증가율을 보인 곳은 제주도. 무려 22.5배가 증가했다. 제주도의 경우 1972년 당시 2천 명에서 79년에는 4만5천 명으로 증가했고, 서울은 18만3천여 명으로 약 2.9배 증가하는 등 전국의 신도수가 고루 증가했다.

특히 서울지역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게 증가율이 높게 나타나는데, 최 교수는 “당시 공업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농촌 인구가 도시, 특히 서울로 몰리는 현상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 교회의 성장이 어느 정도 농촌 주민들의 이동과 연관이 있음을 말해준다”고 주장했다.

가장 많은 성장률을 기록한 교단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1960~1980년대의 성장률에서 기하성은 1,798%에 이르는 성장률을 기록해 타 교단의 2~10배에 이르는 성장속도를 보였다. 기침이 862%, 기감이 543%, 기성이 415%, 예장 합동이 368%, 통합이 279%, 기장이 163%로 나타나, 기장의 성장세는 오순절 신앙과 성령운동을 강하게 주장한 기하성이 크게 성장한 점과 대조를 이루었다. 최 교수는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을 등한시했던 신학적 경향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한국 교회가 급성장한 이유는 뭘까. 최 교수는 “해방 이후 계속된 정치적 불안정과 한국전쟁 이후 민중들의 삶을 짓누르던 경제적 가난의 문제도 종교적 의존감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고 보고, 이와 함께 ‘개인주의’ 또한 개 교회주의라는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한몫을 했다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한국 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여러 가지 폐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필요와 요구에 발 빠르게 대응함으로써 사회적 소통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본 조성돈 교수의 말을 빌어, “개별 신앙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선의의 자유경쟁을 통해 상호발전을 도모하는 긍정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다”면서 한국 교회 성장에 개 교회주의가 크게 작용했다고 보았다.

초교파 혹은 교파 차원의 제도적 요인도 작용한다. 특히 초교파적으로 전개한 ‘대형 전도집회’. 이 시기에 이루어진 다양한 대형 전도집회들은 ‘대중전도부흥회’의 성격을 띤 것으로, “규모와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초기 한국 교회에 성행했던 부흥회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이런 대형 집회들은 1965년의 ‘한국복음화운동’, 1973년의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1974년의 ‘엑스플로74’, 1977년의 ‘77민족복음화를 위하여’ 등으로 이어지며 한국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선도해 나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도시화에 따른 교회의 확대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 인구가 팽창하면서 도시가 확대되는 경로를 따라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주민들을 빠르게 흡수했고, 타 종교들과는 달리 개신교회들은 기본적으로 개 교회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교회를 이전하거나 새롭게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카리스마적 리더십’.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영적 권위에 기초해 조직 구성원들을 변화시키고 헌신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최 교수는 “이런 카리스마적 목회리더십 양상이 경제개발을 중심으로 근대화를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카리스마적 통치방식과 비슷하다”고 말하는데, “뚜렷한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집단을 변화와 성장으로 이끌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영적 요인’으로, “성령의 강한 임재와 영적 체험은 한국 교회의 성장을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고 최 교수는 강조한다. 이와 함께 ‘심령부흥회’도 영적 역동성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집회로 꼽았다. 당시 심령부흥회는 주로 월요일에서 시작해 토요일 새벽에 끝났는데, 이 기간 동안 성령에 의해 각성된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을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교회 성장을 이끌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이같은 교회 내외적인 성장 요인들을 분석하면서, “한국 교회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문화의 환경에 적응하고,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줌으로써 교회 성장의 효율성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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