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37강)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삶에 활성화되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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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37강)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삶에 활성화되는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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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7.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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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네사렛에서의 치유 기적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으로 인해 괴롬을 당하던 제자들을 구출하신 후, 주님 일행은 이제 호수 건너편 게네사렛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주님은 그를 알아보고 찾아온, 그 지역에 있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다(막 6:53-56;마 14:34-36).

여기서 옷가란 경건한 유대인들이 민수기 15장 38-41(“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8절)과 신명기 22장 12절에 의거하여 입었던 옷술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5장 25-34절(혈루병 앓던 여자의 치유)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 사건에서 여인이 혈루병에서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옷을 만지기만 해도 나을 수 있겠다는 신앙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병자들의 믿음의 반응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주님의 기적이 인간의 반응 여하에 달려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주님의 능력은 항상 동일하시나, 그것이 자신에게 효력이 나타나고 않고의 차이는 인간의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런 진리를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례에 비추어 설명해 보겠다. 신용카드를 새로이 발급받으면 사용등록(activation)을 해야만 활용이 가능하다. 그 신용카드로 수백만 원 어치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할지라도, 사용등록이 되어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신용카드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소유자가 사용등록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플라스틱 조각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는 주님의 능력은 여전히 변함없으나, 오늘 우리가 그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지 못한다면, 문자 그대로 그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처럼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용카드를 사용등록을 하는 것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유효하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치유기적은 언뜻 미신적이고 신화 같은 이야기처럼 들려, 메시아이신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한 초대교회의 조작으로 간주하기도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인 까닭에, 인간의 과학적 상식의 적합 여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진리는 인간의 이해 정도에 따라 그 진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과학적 지식과 상식에 근거로 하여 성경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성경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성경의 진리성은 인간의 과학과 상식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과학과 상식이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완벽하게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 세상에는 여전히 고도의 첨단 과학과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散積)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인간의 과학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여, 성경을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인 고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문은 주님이 갈릴리를 떠나시기 전 사역에 대한 마가의 요약정리로 소개되고 있다. 주님 사역에 대한 이러한 정리는 마가복음 1장 32-23절과 3장 7-12절에서도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게네사렛은 마을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비옥한 땅으로, 넓이 1.6 km, 길이 4.8 km 정도의 지역이다.

45절에 의하면 주님 일행은 벳새다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왜 게네사렛으로 갔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마도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또 다른 벳새다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님을 만나자 마자 곧 그가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그 지역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왔다는 것은, 이제는 주님의 소문이 사방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게 한다.
 
게네사렛 사람들이 주님을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다는 사실은 이 사건 바로 앞의 이야기에서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오셨고, 풍랑을 잠잠케 하셨던 주님의 신분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막 6:51)과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주님에 대한 유대 평민들 사이의 좋은 평판은 이어지는 사건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적대감과 역시 좋은 대조를 보이게 된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메시아의 복을 누리지만, 자신들의 지식과 편견으로 주님을 판단한 자들은 다가온 복을 스스로 차버리고 만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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