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빛이 됐던 하나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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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빛이 됐던 하나님의 집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0.11.25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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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기획 // 도심 속 기독교 순례길 - ③ 정동제일교회

새문안교회 - 구세군회관- 정동제일교회 - 이화여고 - 배재학당 - 대한성공회

구세군회관을 나와 왼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완만하게 굽은 모퉁이를 돌면 덕수궁 돌담 뒷길이 오롯이 펼쳐진다. 포덕문을 따라 뻗은 오래되고 멋스런 돌담. 그 틈새에 끼인 이끼들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른편에 보이는 미 대사관저를 지나 200미터 정도 걷다보면 월곡문과 함께 너른 공터와 사거리가 들어온다. 그리고 오른편 전방에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 정동제일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정동극장과 이화여고, 서울시립미술관 사이에 아담하게 위치한 정동제일교회는 지금부터 123년 전인 1887년 10월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시작됐다. 그는 예배를 목적으로 지금 자리에 있던 한옥집을 구입해 개조하고 ‘베셀 예배당’(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재 벧엘예배당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105년 전인 1895년 1월 착공돼 1897년 건축됐다. 한국 최초의 빅토리아식 고딕 붉은 벽돌 서양 건축물이다. 처음 500명 규모로 지어진 후 1920년 교인이 천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증축됐고, 6.25전쟁 당시 예배당이 손상돼 1953년 새롭게 복구됐다.

▲ 1992년 100주년 기념탑.
마치 동화 속 예배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하다. 반면에 창틀은 빅토리아식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지금은 19세기 건축물로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배당 안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도 볼거리다. 하란사 여사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 파이프오르간은 한국 최초의 것으로, 당시 동양에 3개 밖에 없었다.

벧엘예배당은 설립 당시에는 장안의 명물로 구경하는 이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아펜젤러는 1897년 선교 보고서에서 “지붕을 올린 후 8개월 동안 고종황제를 비롯해 시골에서 온 농부들까지도 교회당의 구조에 대해 경이로움을 갖고 구경하러 왔다. 교인들과 외국인들도 감격에 겨워 교회당 주변을 맴돌았다”고 기록했다.

선교 초기 이 교회를 중심으로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병원 등이 설립돼 개화운동을 이끌며 한국 개신교 초기 선교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민족 독립 운동가였던 서재필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주요 인사들이 정동교회 청년회에 소속돼 당시 어느 단체보다 의식 있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제6대 담임목사였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장로가 참여했다. 또 야간학교를 설치하고, 1922년에는 국내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해 선교 사업에 중점을 뒀다.

벧엘예배당 뒤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1979년 건축된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이 있다. 또 1992년 100주년 기념탑과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교회. 신축된 예배당을 보기위해 줄지어 기다리던 행렬은 이제 다시 볼 수는 없다. 민족정신을 간직했던 선교 초기 모두에게 매력적인 교회의 모습을 되찾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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