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순국 90주년 기념작 ‘유관순 이야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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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순국 90주년 기념작 ‘유관순 이야기’ 출간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0.07.14 14: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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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통해 더 생생해진 열아홉 소녀의 ‘독립투혼’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10년 결실 장종현 박사 집필
철저한 고증 통해 생년월일과 에피소드 등 재정리

“만약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준다면 다시는 만세를 부르지 않고 천황 폐하의 착한 백성이 될 수 있겠는가?” 재판장이 물었다.
관순은 순간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그리고 똑똑하게 대답했다.
“절대 그럴 수 없소.”
“나는 죄인이 아니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만세를 부를 것이오.” (독립을 위한 당당한 외침, 유관순 이야기 중에서)

1919년 5월 9일 공주 지방 법원의 1심 판결이 있던 날 유관순 열사의 재판 장면이다. 나라를 위해 늘 당당하게 독립을 외쳤던 ‘유관순’. 올해는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 꼭 90년이 되는 해다. 이화학당 재학시절 3.1 만세 운동에 가담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불살랐던 여인은 처음부터 ‘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밝고 명랑하게 자랐던 말괄량이 소녀였고 어린 시절 하나님을 만나 나라를 위해 매일 무릎을 꿇었던 순박한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있어 유관순은 ‘3.1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그가 남긴 구국의 신앙과 열정은 우리 민족의 자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가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웅진주니어에서 펴낸 독립을 향한 당당한 외침 ‘유관순 이야기’는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가 지난 10년 동안 수집한 열사의 재판 기록과 호적, 족보 등을 바탕으로 뒤바뀐 사실들을 바로 잡아 열사의 삶을 복원한 것이다.

집필을 맡은 백석학원 설립자 장종현 박사는 유관순연구소 초대 소장을 지내면서 유관순 열사의 삶을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보다 가까이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꼼꼼한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유관순 열사 순국 90주년 기념작인 ‘유관순 이야기’를 선보였다.

장종현 박사는 “열아홉살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 간 유관순 열사에 관한 책은 어느덧 어린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 이야기 중 하나가 되었다”며 “그동안 유관순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 책이 70여 종 정도 출간됐지만 생일과 순국월일, 성품과 이화학당 생활 등 여러 이야기들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결국 유관순 열사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정보를 찾아낸 유관순연구소는 당시의 신문, 호적과 족보, 친구들의 증언까지 수집했다.

‘유관순 이야기’가 다시 읽혀져야 할 위인전으로 추천받는 이유는 공식적인 기록에 없는 열사의 삶까지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번 전기에서 바로잡은 부분은 유관순 열사의 생년월일과 순국일 그리고 형량 등. 그동안 열사의 생일은 한 고장에서 자란 먼 친척 조카 유제한이 쓴 ‘순국처녀 유관순전’에 기록된 1904년 3월 15일이 정설처럼 굳어져왔다. 순국일 역시 유제한의 기록에 따라 ‘10월 어느 날’, 혹은 ‘9월 어느 날’로 알려졌다.

하지만 백석대 유관순 연구소는 호적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수형기록표 등을 확인해 열사의 생년월일이 1902년 12월 16일임을 확인했다. 또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이 아우내 만세운동 현장에서 순국한 이후 열사의 호적이 오빠 우석에게 기재되었고 자료를 확인한 결과 순국일을 1920년 9월 28일로 밝혀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백석대 유관순연구소의 논문을 받아들여 2007년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읽기’ 교과서를 통해 사실을 바로잡아 기록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의 형량도 7년 징역형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지만 연구소가 형사사건부와 경성복심법원판결문을 분석해 1심 5년에 2심 3년을 구형받은 것을 알아냈다. 이 역시 개정 교과서에 반영됐다.

이 전기가 주목을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어린 시절 친구들의 증언을 통해 풍성한 에피소드를 담아냈다는 점이다. 유관순연구소는 수년에 걸쳐 생전 이화학당 친구였던 보각스님(속명 이정수)과 마을 친구 남동순 여사를 인터뷰했다. 이들의 증언은 유관순이 달 밝은 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진뺏기와 술래잡기를 한 이야기나, 당시 유행하던 귀밑머리, 황새머리, 조랑머리를 하고 다녔던 사실, “무쇠 돌격 청년 남아야”와 같은 우국 창가를 즐겨 불렀다는 일화들을 찾아냈다.

또 이화학당 시절, 우스운 말을 곧잘 해 친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열사의 성품 또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유관순연구소 2대 소장 김기창 교수는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은 남동순 여사의 증언을 따랐고, 3.1 만세운동 후 이화학당 휴교로 고향에 내려오는 기차에서 ‘칙칙 폭폭’소리를 듣고 ‘독립 만세’를 외쳤던 일화는 보각스님의 증언에서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백석대학교가 유관순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학교의 지리적 위치가 갖는 역사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더 깊은 이유는 항일 민족지도자로 알려진 유관순 열사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는 안타까움이 깔려 있었다.

현재 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3대 소장 박충순 교수는 “3.1운동의 상징이자 아우내만세운동의 주도자였던 유관순 열사를 통해 ‘자유와 자주’ 정신이 주는 의미를 재점검하고자 했다”며 연구목적을 밝혔다. 또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에 나서기까지 그를 이끌었던 신앙의 힘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지난 10년, 유관순연구소는 열사의 인간적인 삶과 희생과 봉사를 자청했던 기독교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에게 얽매이거나 구속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주권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자주적인 정신이 애국애족의 사상과 항일 구국운동으로 승화됐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종현 박사는 “유관순 열사는 어린 시절 평범하나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소녀였고 성장하면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가르침, 신앙생활, 본인의 노력에 따라 점점 바른 가치관과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소개했다. 또 “어려운 일이나 갈등, 고민 등이 생기면 좌절하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며 그녀의 깊은 신앙에 존경을 표했다.

연구소 10년의 결과물을 어린이 청소년용 ‘전기’로 택한 장종현 박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많은 어린이들이 유관순 열사를 100년 전 좌절과 아픔을 딛고 열심히 살아갔던 한 친구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며 “나아가 유관순 열사처럼 봉사와 희생정신이 아이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이번 전기 발행에는 사단법인 류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큰 도움을 주었으며,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이 책을 배포하면서 유관순 열사의 삶을 바로 알리는 일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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