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다시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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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다시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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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7.0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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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건 목사<고려신학대학원장>

“목사님, 저 집 나가고 싶어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쉽게 말하는 소리이다. 또 부모들도 “아이가 도무지 말을 안 듣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는 볼멘소리를 자주 한다. 부모가 자녀에 거는 기대는 크지만 자녀는 충족시키지 못한다.

자녀들이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고, 그래서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대화할 시간이 없다. 주일날 부모는 자녀가 잠을 자게하고 교회로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성경의 원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역사를 담고 있으며, 또 회복을 바라보고 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는 실패의 역사를 가정 파탄에서 찾는다. 이혼으로 가정이 무너지니 자녀들이 내팽개쳐지고, 그들이 방황하고 방탕하게 된다. 말라기서는 하나님은 한 여인과만 가정을 이루게 한 것은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고 말한다(2:15).

유대인의 사회는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철저하게 토라(율법 혹은 성경)를 가르치는 교육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 구절을 하루에도 수십 번 외운다. 그들은 이 구절을 ‘메주자’라는 작은 상자에 담아 이마와 팔목에 붙이고 다니며, 또 문지방에 붙여놓고 집에서 나갈 때와 들어올 때에 암송한다.

그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라는 내용이다. 말라기 시대에 가정이 무너지고 ‘쉐마 이스라엘’에 근거한 가정교육이 없어져 버렸다. 바로 구약시대 최종적인 실패의 모습인 것이었다.

말라기서는 또한 회복을 바라본다. 그 준비를 위해 사자, 즉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한다(말 3:1, 4:5). 그 길잡이가 어떻게 길을 준비하는가?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다(4:6). 즉,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신약 누가복음은 길잡이 세례 요한이 이 일을 하는 것으로 회복의 시대가 되었음을 알린다(눅 1:17).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에 성 안에는 힐렐의 제자인 요하난 벤자카이가 있었다. 그는 성이 곧 무너질 것을 알고 예루살렘 성에 있는 어머니들을 학교로 모아 연설하였다.
“어머니들, 다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다 빼앗겨도 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어머니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시체 속에 누워 성을 탈출하였고, 디도 장군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랍비는 로마 장군에게 세 가지를 요청하였다. ①성 안에 있는 조그만 학교 건물과 그 안에 있는 책들은 불태우지 말고 남겨 달라. ②한 도시를 주어 거기에 학교를 세우게 해 달라. ③가말리엘(힐렐의 증손자로서 바리세 지도자)을 살려 보내어 달라. 디도 장군은 약속하였고, 그렇게 이루어주었다.

요하난 벤자카이. 그는 성전을 포기하였으며 대제사장을 구출하지 않았다. 바로 토라를 가르칠 수 있는 학교와 책, 그리고 선생을 살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야브네 마을에 학교를 세웠다. 그로부터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교육의 종교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유대인과 유대종교는 살아남게 되었다.

아직도 그들은 어릴 때부터 ‘쉐마 이스라엘’을 따르는 교육을 한다. 유아 때부터 초, 중, 고등학교 시절까지 가정과 또 유대인 학교에서 철저하게 토라를 가르친다. 그런데도 그들은 세계 학문을 선도하는 민족으로 우뚝 섰다. 우리 부모들은 영어 단어하나 더 외우게 하려고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교육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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