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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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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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2.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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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목사 <의왕중앙교회>


양보는 아름다움이고 미덕이다. 나를 살피고 이웃을 살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양할 양(讓) 걸음 보(步) 즉,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 주거나 자기의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좇음을 양보라고 한다.

오늘 우리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양보를 부끄러움으로, 힘이 없거나 상황에 밀려 빼앗김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섬김과 양보의 즐거움과 그 기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왜곡된 양보에 대한 이해이고 선입주견이고 생각들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폭 좁은 흑백논리에 자신도 모른 채 길들여지고 젖어 살아왔다. 그 시작이 어디인지, 그 뿌리를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주변의 강대국에 비하여 작은 나라, 소수민족으로서 그 존재를 유지하고 견뎌오면서 생존의 법칙으로 터득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고(思考)와 사고의 폭과 깊이의 넉넉함 그리고 융화와 공존, 더불어의 여유를 가질 수 없음으로 해서 생존을 위한 사고의 태도가 흑백논리의 근거한 옳고 그름, 아군과 적군, 우리 편과 반대편의 상황논리가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이 아닌가 유추해본다.

타협에 대하여도 비판 일률적이다.

타협을 생각하고, 조정하고 또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한다.

19세기 말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우리 민족전체가 휘말리면서 더더욱 흑백논리는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은 듯하다.

나와 우리를 하나로 하고, 나와 우리가 아닌 공동체나 개인을 적으로 간주하는, 나와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이 다른 생각이나 사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적이나 나를 해할 자나 공동체로 받아들임으로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살기 위하여 다른 생각이나 반대로 사고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제거하거나 죽여야 하는 대립적 사고가 시대와 우리네를 지배하였다. 무섭고 두려움의 생각을 넘어 실제로 제거에 나서고, 그 결과는 우리 민족을 이념전쟁에 내몰지 않았던가.

노사 간, 개발자와 개발지역 사람들 간의 첨예한 대립이 생각도 하기 싫은 용산 참사가 아닐까 싶다. 양보를 굴종으로 생각하는 사고의 양극화 현상은 우리 모두를 빈부의 대립, 노사 간의 대립, 권력과 투쟁의 대립 등 우리 모두를 벼랑 끝에 세운다.

백성의 양보를 굴종으로 여기는 권력자나 국민, 예절을 아첨으로 보는 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극한적 대립사고는 우리 모두를 투쟁의 현장으로 내몰고, 서로 더불어함께 살고 세우는 상생을 불가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양보가 가능하려면 여유와 너그러움,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 아닌 상대에 대한 배려가 양보를 이끌어 낸다.

양보하면 생각나는 것이 전철이나 버스 속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어르신이나 임산부, 장애인 등 자릴 양보해야 할 대상들이 있다. 우리 서로가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때론 젊은이지만 지쳐 보이는 사람에게 자리를 내 줄 수 있는 어르신, 종일 학교에서, 학원에서 도서관에서 지친 학생을 자리에 앉히고 싶은 여유와 따뜻함이 우리를 대립이나 갈등이 아닌 양보와 너그러운 이해로 우리를 이끌지 않겠는가.

성경 창세기 13장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애굽에서 나와 네게브에 이르고 네게브에서 떠나 가나안의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장막을 쳤는데 두 사람 즉 삼촌과 조카가 모두 부자가 되고, 거할 땅이 좁음으로 생긴 갈등을 집안 어른인 아브라함이 양보를 통해 조절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9절 말씀이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약육강식이 생존의 법칙이던 고대의 그 사회에서 이런 양보를 배경으로 하는 분리가, 이 너그러움, 이 양보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창사22주년을 맞이하는 ‘기독교연합신문’을 축하하고 축복한다.

언론의 중요 사명 중에 비판의 사명을 결코 간과 할 수 없는 본질적 사명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교단 분열과 대립의 현장에는 언제나 모난 언론이 있었고, 없으면 만들어 그 역할을 맡겼다.

기독교연합신문은 한국교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 중의 하나인 ‘양보’를 이끌어 내는 ‘더불어’의 신문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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