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94강)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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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94강)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 승인 2008.03.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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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이 아닌 평화의 통치의 시작

 


열 므나 비유 이후 주님은 거룩한 구속 드라마의 마지막 장을 열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신다(눅 19:28-38).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사전에 미리 벳바게 마을 안에 살고 있는 지인(知人) 혹은 친구들과 일종의 협의를 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러나 이곳의 말씀과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하신 말씀(눅 22:7-13)을 고려할 때 그것이 주님의 신적인 예지력의 한 증거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참고, 삼상 10:2-9).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주님은 여기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김경진교수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백성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 즉시 왕의 행렬이 시작되었던 베다니로 물러가 한 밤을 보내신 것으로 되어 있다(막 11:1-10). 아마도 마가의 심중에는 스가랴의 예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슥 9:9-10), 그것은 언젠가 왕이 나귀를 타고 시온으로 오시며, 그러한 행위는 왕의 권위가 무력이 아니라 평화로운 통치를 시행할 수 있는 능력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열정적인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 왕국을 여는 분으로 칭송하였는데, 사실 누가는 명절 때 성전에 올라오는 순례자들을 향한 제사장의 축복을 가리키는 시편 118편 26절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여 ‘왕’이란 단어를 추가함으로써, 무리들이 메시야의 대관식 행렬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음을 시사하고 있다(눅 19:38).

 

만일 주님이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의도하였다고 한다면 그의 목적은 민족적 열정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감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실 민족적 열정은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는 유월절 절기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주님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금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선포하고자 하였지만, 오랫동안 약속된 통치의 성격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 한 마디로 로마제국의 통치에 무력으로 항거하는 열심당(Zealot)의 행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이다.

 

구약의 예언은 땅 위에 평화가 임할 것을 말하였는데, 누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리가 하늘에서의 평화를 노래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38절). 이로써 누가는 하나님이 하늘에 평화의 선물을 예비해 두었고 이를 땅 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하심을 보여준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은 천상적 차원에서 악의 세력을 이미 정복하였고(참고, 눅 10:17), 그 결과로써 천상의 승리가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서 이뤄질 수 있도록 의도하시고 기대하신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열정의 표현이 로마인들에 의해 정치적 폭동으로 오해되어 예수님 자신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보복 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9절). 이에 대해 주님은 자신의 도래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하나의 준비였던 바로 그 사건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만일 그가 이 같은 당연한 환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순례자들이 밟는 도로의 돌들이 소리쳐 저항할 것으로 응답하였다(40절; 비교 합 2:11).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주님이 우시는 장면은 왕으로서의 행렬이 성공할 것으로 주님이 믿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눅 19:41-44). 이것은 복음서 서두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보실 것으로 예언되었고(눅 1:68-71),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 주님이 예루살렘에 왔건만 예루살렘은 그것을 준비하지 못함으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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