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러한 염려는 전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다.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그 생명의 연장을 위해 필요한,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선물에 불과한 음식과 의복을 주시지 않겠는가? 또한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공중 나는 새와 잠시 피었다지는 꽃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 그 자녀가 되는 사람들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여기서 공중의 새와 야생 백합화는 가장 하찮은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가리킨다.
염려는 또한 부적절하다(눅 12:27-28). 왜냐하면 어리석은 부자가 마지막 시간에 뒤늦게 배웠을 법한 교훈처럼, 염려는 죽음의 순간을 단 한 시간도 연장시킬 수 없으며, 그 어떠한 다른 일에 있어서도 전혀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눅 12:25-26). 염려는 또한 이방적이다. 왜냐하면 염려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처럼 기도하는 자세는 그 자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은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눅 12:29-30).
이처럼 제자들의 헌신을 방해하는 염려에 대한 처방은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즉 개인적 필요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눅 12:30).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쓸 때 다른 삶의 필요들은 비로소 채워지고 풍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 삶을 책임질 것이며, 또한 삶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 생각보다는 단순하고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 또한 염려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종들은 세상에 대한 염려를, 그의 운명이 하나님 손안에 있으며 도둑과 좀과 같은 피해에 대비한 확실한 보물이 하늘에 있다는 확신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눅 12:33-34).
주님이 그 적은 무리들에게 약속한 기업은 너무 거대하게 보이고 승리의 희망 또한 요원하게 보일 수 있을는지 모른다(눅 12:32). 그러나 주님이 주신다고 약속한 나라는 저 세상의 꿈이나 요원한 역사의 마지막이 아니라 현재 누릴 수 있는 선물임을 제자들은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눅 12:32; 참고, 8:9-10, 18). 이런 견지에서 누가복음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장차 발생할 미래적 측면보다도 오히려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 자들이 돌봄을 받는 현실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나타난(눅 17:20-21).
이러한 메시지는 주님의 취임설교에서 가난하고, 눈멀고, 옥에 갇히며, 눌린 자들에 대한 축복이 오늘 성취되었다는 주님의 선언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눅 4:18-19, 21). 아울러 여기서 기억되어야 할 것은 주님이 약속한 그 선물은 제자들의 인간적인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신 의도, 즉 그 영원한 은혜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보장된 선물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