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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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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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0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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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목사<이수중앙교회>


성서처럼 역동적으로 효를 가르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유교가 효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지만, 결국은 예와 허례의식에 치우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의 중심이 항상 절대자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뿌리 내려 있다. 기독교 효의 뿌리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짊어지우고, 자신은 칼과 불을 가지고 모리아 산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이 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고 묻는다.


이때처럼 아브라함에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가슴이 저미어 오고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 이삭아! 너는 내가 너를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네, 아버님!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어떤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설령 내가 너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고 하더라도 너는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니? 네” 이렇게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그래서 120세에 가까운 아브라함이 17세의 청년 이삭을 결박해서 제단에 올려놓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눈물겨운 효심인가?


우리는 이러한 효심을 예수님에게서 보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6:38-39)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신 후에 순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의 사건이나 골고다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두가 효의 극치이며,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효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가 있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신부에 대한 신랑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신랑 되시는 성자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보혜사 성령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가정에 아버지와 신랑 그리고 어머니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지금도 어머님으로부터 받는 은혜가 태산과도 같다. 어머님은 자식의 밥이다. 자식은 어머니의 몸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를 먹고 산다.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서울에 오신 어머님이 큰 딸 집에 머무는 동안에 갑자기 급성 신장염에 걸리신 것이다.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되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고 계셨다. 그 날이 목요일이었다고 한다. 그 고통의 순간에도 어머님은 이 불효자식을 생각하고 계셨다. “네 오빠에게는 전하지 말거라,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 사순절 특별 기도회며, 대심방을 하느라고 얼마나 피곤하겠느냐? 주일 날 오후 예배 끝나걸랑 이야기해야한다”고 수도 없이 당부하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목이 메어 한없이 울었다. 당신은 온 몸이 불덩이가 되어 전신이 부들부들 떠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피곤할 아들 걱정만 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우리들의 어머님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님을 통해서 가정에 나타나, 불효자식들의 마음을 울려준다. 나는 우리 가정의 사랑의 발원지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이 꽃이 피는 곳도 바로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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