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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0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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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목사<초동교회>


‘탓’을 논하기 전…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사건이어서 할 말을 잃었다. 먼저 “희생당한 분들의 명복을 빌며 부상자와 유가족, 그리고 미국 국민 여러분에게 마음으로부터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보낸 위로전문을 기독교연합신문의 독자와 함께 보내며 시론(時論)의 입을 연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의 빠른 사과성 발언에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집단적 죄의식’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에게는 피붙이를 중시하는 정서가 있기 때문에,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사살하고 30여명을 다치게 한 후 자살한 미국 이민 1.5세대인 조승희라는 한 개인이 일으킨 미국 역사상 최대의 총기난사 사건을 우리의 사건으로 품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매스컴의 입장을 보면 ‘탓’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사건의 원인으로 미국의 총기소재의 자유를 문제 삼기도 한다. 미국 민주주의 문제점 중 하나가 총기 구입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총기 협회는(NRA) 1년에 1억 달러의 로비자금을 정치권에 뿌리는 큰 손이라고 한다. 이번 사건도 대학 캠퍼스 내에 총기소지가 허용되지 않아 방어를 할 수 없어서 대형 사고가 되었다는 논리를 총기소유옹호단체(GOA)는 주장하며 총기소지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입장은 사회의 구조가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게 한 온실이 되었다는 해석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 하나의 현상은 조승희를 분석하는 것이다. 사건을 일으킨 범죄동기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자라온 환경을 뒤져서 ‘외톨이’가 되었던 것을 발견했다. 문제아였고, 정신 병력도 있고, 자폐 증상도 있으며,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이라는 발달장애를 발견해 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를 외톨이가 되게 한 상황의 ‘탓’을 말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일보 기자인 장명수는 ‘아메리칸 드림의 참담한 종말’이라고 평가하면서, 미국이민의 목적의 하나인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는 우리의 이상 교육 열풍에서 원인을 찾으려 한다. 우리는 이민 사회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미국으로 이민하여 8살의 어린 아들을 길 위에 버린 것과 같은 부모의 ‘탓’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 사회의 병적인 교육열을 도마에 올릴 수 있다. 교육열의 뿌리를 살피면서 성공지상주의와 배금주의에 물든 잘못된 가치관 위에 세워진 우리의 사회 구조를 탓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성장하는 과정에서 ‘외톨이’로 만든 상황들을 지적할 수 있다. 조승희 자신이 남긴 글을 보면 세상에 대한 강한 분노가 담겨 있다. 그는 사건의 책임을 ‘잘못된 사회 탓’에 돌렸다. 과연 이런 태도를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탓’을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담의 후예’이기에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먹었습니다”(창3:12)하였던 아담의 말은, 하나님이 원인제공자이며, 자신의 범죄는 하나님 탓이라는 결론이다. 이렇게 탓을 논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탓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탓 찾기”가 아니다. 루돌프 사슴은 코가 빨개 동료로부터 외톨이가 되었으나, 산타가 루돌프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어 품어 줌으로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탓”을 논하기 전에, 손을 내미는 행동이다. 눈을 열어 살피면 지금 손길과 마음이 필요한 강도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에게는 “탓”을 찾기 전에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이 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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