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진정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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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진정 희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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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7.0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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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핵집목사<열림교회>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에 희망을 주고 있는가? 아니 교회는 미래를 열어 가는 희망인가? 이 물음에 흔쾌하게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5월에 발표한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지난 10년간 종교 인구는 237만 3천명이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불교, 원불교 그리고 가톨릭이 증가한 것에 비하면 유독 개신교만이 14만 4천명이 감소한 것으로 통계에 나와 있다.

이 통계를 보며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 일까? 가장 공격적인 선교전략을 가지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교회성장을 자랑해 왔고 교회의 규모나 열심을 자랑해 오던 교회가 왜 감소세로 들어섰을까? 심각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개신교만큼 사회에 많은 봉사 기관을 가진 종교가 없고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조건 속에 있으면서 말이다. 사회에 가끔 물의를 일으키는 사회면 기사에다 핑계를 댈 것인가? 아니다 분명 개신교가 감소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변화하는 사회를 읽어낼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성장에 기대어 똑같은 공격적인 선교방식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의 모습은 비기독교인의 눈으로 볼 때 기업을 하는 이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일 들게다. 종교 안에서  무언가 세상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서 개신교는 이미 눈밖에 낫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동안 덧씌워진 포장들을 벗겨내고 자신의 본질을 들어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진정 세상 사람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는 희생과 저주와 비난의 자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한 자리요. 죽음의 자리요, 고통의 자리이다.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를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피해갔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십자가의 자리에다 교회를 세웠다.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로 탈바꿈 시켰다.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피해 가는 죽음의 자리에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이 십자가의 공동체이다.

사도바울은 버려진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주워 들었다, 그 십자가를 최고의 브랜드 가치로 만들었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짊어지지 않으려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가장 소중한 가치로 자랑했다. 여기에 능력이 있었다. 십자가는 버리는 자리요, 희생의 자리요, 고통의 자리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며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능력으로 만들었다.

교회는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경쟁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을 살리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고통의 자리에서 생명을 노래하고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초기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고 누구도 짊어지지 않으려는 희생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희망을 발견했다. 교회 안에서 희망을 꿈꾸고 기도했다. 다시금 이 땅의 죽음의 자리, 비난받고 경멸받는 곳에 교회의 둥지를 틀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드릴 용기가 있을 때 교회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다.

세련되고 품위 있는 교인을 양산하는 교회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에서 묵묵히 십자가를 짊어지는 교인들로 채워 질 때 교회는 진정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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