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국내 성지순례(12) -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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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국내 성지순례(12) -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 현승미
  • 승인 2005.07.0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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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교육과 민중운동의 효시

영흥학교는 1903년 벨 선교사 사랑채에서 출발하였으며 정명여학교는 1902년 스트레이퍼 선교사 안방에서 출발함으로 목포에서 서양교육이 처음 시작됐다.


영흥학교는 미국의 왓킨스의 지원으로 양동에 돌집을 신축하였으며, 이 학교 출신 중 문용기가 익산 3․1운동을 주도했다. 세계적인 민중신학자 서남동교수도 이 학교 출신이다. 특히 영흥학교는 개교 이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태극기를 개양하고 아침예배를 드렸다. 3․1운동 당시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함께 만세를 불렀다. 더욱이 정명여학교에서는 그해 10월 4일 30여명의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정명여학교는 맥콜리(H.D. McCallie) 선교사가 자신의 집안에서 보낸 기금으로 1922년에 목포에서 최초로 석조 학교를 신축했고, 이를 기념하여 맥콜리기념여학교라고 불렸다. 이 학교 제 1회 졸업생인 박화성은 여류작가로서 그가 쓴 중아일간지 연재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목포시에서는 노적봉 아래 옛날 러시아영사관(후에 목포시청)자리에 박화성 문학관을 개원하였으며, 입구에는 그가 성경과 찬송가를 책상위에 놓고 원고 쓰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러나 일제말엽 신사참배 반대로 두 학교가 모두 폐교가 되었으며 해방 후 선교부의 도움으로 복교하여 그 옛날 미션스쿨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성지순례 문의:2230-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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