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파선 암 딛고 변호사된 `역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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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파선 암 딛고 변호사된 `역전의 삶`
  • 현승미
  • 승인 2005.05.11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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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영의 ‘피아노 치는 변호사, Next`

“나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고급코스의 피아노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변 분들의 도움과 나의 노력으로 당당하게 실력으로 예원학교,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15년간 계속된 나의 ‘피아노 사랑’은 1989년 임파선암 선고를 받고 접어야만 했지요.”


얼마 전 30대 중반의 평범해 보이는 한 변호사가 마치 일기 같기도 하고, 자기고백서 같기도 한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박지영(하이기쁨교회 집사)의 ‘피아노 치는 변호사, Next’.


변호사가 피아노를 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싶다. 물질적 어려움 없이 부자 부모 밑에서 풍족하게 자랐나보다. 아니면 뒤늦게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한계를 느껴 진로를 바꿨나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오는 영어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Next’.


사실 그는 부유한 삶을 누리지도 못했고, 자신의 의지로 진로를 바꾼 것도 아니었다. 아직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 빠져 있을 초등학교 때부터 그는 피아노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빠의 사업실패와 계속되는 가정형편의 곤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피아노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일 때문에 창원으로 내려간 아빠와 가족들을 생이별시킨 철없는 막내둥이에게는 당장 사춘기 시절 또래친구들 사이에서 느껴야하는 비애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씩 걸려 학교를 갈라치면, 또래친구들을 태우고 유유히 그 옆을 지나가는 승용차들. 제대로 된 피아노나 연습공간이 없어 그나마 2시간 걸리는 거리도 새벽 일찍부터 나와야 했던 자신을 달래고 위로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리라.  


“초등학교 5학년 때 집안형편 때문에 엄마의 권유로 피아노를 그만 두려고 했었지요. 예원학교에 합격했을 때도 등록마감시간이 지날 때까지 엄마랑 둘이서 그저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방에 계신 아빠가 등록을 하셨더군요. 예고에 입학할 때도 엄마는 인문고에 진학할 것을 권고하셨지만 더 이상 제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길에 한 번의 대학진학 실패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신 1등급, 아침 5시 기상해서 아침, 저녁으로 2시간씩 연습, 그러나 10명 중 2명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당시 대학문턱은 너무나 높았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재수학원에 등록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힘겨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예닐곱번의 항암치료에 효과는커녕 부작용만 심해졌고, 어릴 적 피아노를 향한 강한 집념은 이제 병원을 떠나 스스로의 자생의 길을 택했다. 1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놀랍게도 완쾌했지만,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시험장소 앞에서 시험 볼 수 있게 해주신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그는 서울대 작곡이론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평생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는 인생역경을 거쳐 온 그는 “우리의 삶이 한정돼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한시적인 시간동안 분명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한정된 삶, 한정된 시간을 정해 봉사하고 섬기자는 의미로 ‘한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선교단체 ‘한시미션(대표:조병호목사)’과 인연을 맺게 됐다. 농촌 오지, 도시빈민, 소년소녀 가장, 장애우 등을 돕던 그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현재 변호사 30명, 직원 50명이 모두 기독인으로 이루어진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일하며, 15년째 변함없이 한시미션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자 하는 그의 ‘Next’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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