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딛고 정치일선에 뛰어든 부산소정교회 장향숙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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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딛고 정치일선에 뛰어든 부산소정교회 장향숙성도
  • 승인 2004.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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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향한 하나님의 정의 실현할 터”

소아마비 장애로 정규교육 한번 못받았지만 성경통해 한글 깨치고 장애인·여성 인권운동 전개

“요즘 얼짱 이라는 말이 유행인데 진정한 얼짱이 무엇인지 우리 장애인들이 기필코 보여 줄 것입니다.”

이 말은 중증 장애인으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후보 1번을 받고 당내 경선을 통과해 중앙위원이 된 장향숙 중앙위원(46·부산소정교회)이 ‘중앙의원 대의원 대회’에서 선언한 것이다. 장 위원은 휠체어가 없으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다. 장씨는 여성과 장애인들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지난 1996년 ‘황금고리’라는 장애인단체를 결성해 지금까지도 여성과 장애인 인권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여러 소외된 계층의 열렬한 후원과 추천으로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장향숙. 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국회에 입성할 장씨가 이제 정치의 현장에서 희망을 만들기 위해 힘차게 일어선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의 교육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고 학교 걸상에 한번도 앉아보지 못한 장씨는 모든 교육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배웠다고 고백했다.

경상북도 영주의 한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나 2살이 채 되기 전에 소아마비 판정, 두 다리를 못쓰게 됐고 오른손도 일부분 마비됐다. 그러다보니 학교에는 다닐 수 없었지만 ‘못 배워도 하나님 말씀에는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신앙이 장씨를 일으켜 세웠다. 가난했던 까닭으로 읽을 책이 없어 읽었던 성경을 무려 수십 번을 통독했고 두꺼운 성경책 읽기가 바탕이 되어 어려운 책들(철학, 역사 등등)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고 전한 장씨는 이내 상기된 얼굴로 옛 추억을 떠올렸다.

“저희 집은 4대째 기독교집안이었어요. 부모님 또한 교육의 혜택을 못 받았지만 신앙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모님의 신앙아래 농번기를 제외한 모든 날은 항상 부모님과 함께 5남매가 모여 국한문성경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가정예배를 드렸어요.”

성경 읽기를 거듭하며 5세가 되던 해 한글을 깨우쳤고 수많은 책들을 읽는 계기가 됐다. “당시 시골에 책이 많이 없었는데 읽다 읽다 읽을 책이 없어 자꾸만 보게된 것이 성경책이었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35번 이상을 읽게 된 것이죠.”

장씨는 정치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전했다. 다만, 한 사람의 장애인으로서, 그것도 여성으로 20여 년을 장애인인권운동에 앞장서오며 많은 사람들이 장씨를 알게 됐고 지금까지의 현장에서 경험한 수많은 문제점과 필요성을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높여달라는 연유로 입당추천을 받게 된 것이다.

한때는 장씨도 중증 장애를 가진 자신이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많은 의심을 가졌다. 하지만 학교교육, 취업문제 등 우리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나 혼자서라도 나서야 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장애인인권문제에 대해서만은 적임자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장씨 또한 기도로 결심했다. ‘한번 해보자’라고….

그 뜻이 받아들여져 지난해 12월 5일 이경숙(열린우리당)창당공동준비위원장의 추천으로 입당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일들에 대해 장향숙씨는 “국회의원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다만 우리사회가 장애인에 대해 너무나 많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편견과 차별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죠. 선진국의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이 우리나라에는 팽배해 있어요. 수많은 장애인들이 동등한 기회조차 꿈꿔보지 못한 채 살아왔어요. 저는 그것이 누구의 문제라는 것 보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장애인들에게 실제로 일 한번 제대로 시켜보지 않고 ‘잘 못할 것이다. 문제가 있을 것이다’라고 속단해버리죠.”

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장애인 스스로도 활발한 사회활동에 참여 해야 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장씨는 자신 또한 자신만의 벽을 만들어 살았던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아버지의 사업으로 인해 열여섯 되던 해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 이후 스물두 살이 되던 때 휠체어를 타고 도시의 골목으로 처음 나서던 날까지 자신은 가장 우울하고 불행한 6년을 보냈다고 전했다.

도시는 장씨에게 갇혀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역력했고 창문을 열면 잿빛 건물, 저 멀리 부두에서 피어오르는 공장의 연기와 오가는 배들이 전부였다. 맑은 공기도 따스한 햇살도 친구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그 당시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어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욕구는 장씨를 자극하기에 이르렀고 자신이 누군지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가족 이외의 환경이 더 필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비롯해 부모도 형제도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몰랐다. 가족 모두가 우울한 장씨와 대화하기를 어려워했고 어머니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기도하고 찬송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장씨가 용기를 내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따사로운 햇살에 대한 그리움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들이었다. 그런 왜곡된 시선은 장씨에게 일할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사회 속에서의 자기 위치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현실을 알게 된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걷지 못했기에 아니 걷는 방법조차도 몰랐기에 어린시절 유난히 날아다니는 꿈을 많이 품었던 장향숙 중앙위원.

여성과 장애인의 인권, 나아가 여성장애인의 인권문제에 대해 자신있다는 장씨는 “편견을 극복하는 최대의 길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있더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자신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이라며 약한 자를 들어 쓰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약사항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장애인자립생활, 한 부모 여성빈곤 등 모든 소외된 계층의 다양한 어려운 문제와 과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겠다고 밝힌 장향숙 중앙위원은 참여정치의 증거가 될 것이며 내세울 권리보다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꿈과 희망, 미래가 있는 정치를 펼쳐가는 크리스천 정치인이 될 것을 다짐했다.

송준영기자(jysong@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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