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적 설교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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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적 설교라야 합니다
  • 승인 2003.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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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훌륭한 내용을 갖춘 설교라고 해도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할 때 손상을 입습니다. 설교원고가 다 마무리되면, 따라서 그 설교를 성육화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화신적 설교입니다.

일찍이 일리온 존스교수는 ‘설교의 원리와 실제’라는 책에서 설교학은 신학생이 아니라 설교를 해 본 목회자에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설교에 대하여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학생보다는 설교를 해오면서 문제점에 직면해본 경험자들이 설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뜻을 담고있습니다.

화신적 설교란 두가지 측면에서 정의됩니다. 하나는, 설교내용의 구성과 표현이 단순히 본문을 석의해 놓은 책을 적당히 옮겨온다거나 좋은 자료들을 잘 배열하여 구성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순수한 설교본문에 대한 준비일 뿐입니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그 설교내용과 설교자의 관계가 어떻게 이룩되는가에 화신설교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즉, 단순한 본문의 의미전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전혀 화신설교가 아닙니다. 이 설교는 준비한 메시지와 자신이 일치됨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말씀의 적용에서 설교자의 심성과 삶의 내용이 외치고자하는 말씀의 내용과 일치되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있음을 말합니다.

예를들면, 언제나 교만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사는 설교자가 ‘겸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을 때 설교자는 스스로의 모순을 발견하게되고 회중은 설교자가 먼저 겸손을 실천한 후에 그 주제를 자신들에게 설교해주길 바라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설교의 ㅁ메시지가 설교자의 삶으로 승화되어 나타나는 성육화된 메시지를 말합니다.

둘째는, 전달에서 나타나는 화신적 설교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넉넉히 잘 감당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의 어감과 그렇지 못할 때의 어감이 많은 차이를 보이게 마련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설교자 자신이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을 때의 어감은 확신에 차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어의 흐름은 단순한 강의나 설명의 음정이 아닙니다.

비록 높은 소리를 지르지 않더라도 회중은 그 메시지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설교자를 새롭게 우러러 봅니다. 자신들이 실천하기에는 매우 힘겨운 메시지의 경지를 설교자가 이미 도달하여 거기에서 우러 나오는 설교를 하고 있음을 알게되는 회중은 차원이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로 살다가 간 설교자들이 남긴 설교는, 설교 이론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은혜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메시지의 성육화를 이룩한 설교현장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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