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논리 뛰어넘는 복음적 통일운동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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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 뛰어넘는 복음적 통일운동 시급"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5.03.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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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70년, 화해가 먼저다’ ⑤한국교회 통일운동사

올해로 남한에 온지 18년 됐다는 북한전통음식연구원 이애란 원장. 탈북여성 1호 박사이자 인권운동가로도 잘 알려진 그녀는 한국교회의 통일을 보며 의아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통일이라는 이름 아래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

“통일이라는 목표는 아래 각자 추구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제가 남한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서로가 다른 통일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같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통일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현재 한국사회에서 통일운동을 한다고 하는 단체들은 집계가 힘들 정도로 많다. 교회 안에도 무수한 단체들이 각각의 형태로 통일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장의 지적처럼 통일이라는 같은 목표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통일 단체들은 진보와 보수로 갈려 세상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마찰을 빚고 있다.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 통일운동이 ‘복음’ 아래 화해와 연합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가 그동안 걸어온 통일운동을 돌아보며 그 답을 찾아가 보자.

#민중을 통일 주체로 강조한 1970년대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후 북한에 대한 남한의 입장은 대화나 협상의 대상이 아닌 ‘쳐부수어야 할’ 적이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통일론은 ‘북한은 사탄이 지배하는 지역이며 학정과 굶주림 속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속히 구원해야 한다는 반공통일론의 기독교 버전’ 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통일 문제에 대해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것의 없었다.

이러던 와중에 1972년 체결된 7․4공동성명은 한국교회가 분단체제에 순응하여 통일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하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통일 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한편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의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자각은 같은 해 10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과 사회정의 기독교협의회’를 조직으로 이어진다. 또한 당시 김재준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참여했던 민주수호국민협회의 성명을 통해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과 ‘남북한 정권 사이의 이해득실에 얽혀 통일 논의가 도리어 민족분열을 영구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민중을 통일운동의 주체로 파악해야 한다는 관점은 1980년대 들어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다. 교회협은 1985년 열린 제34차 총회에서 “평화의 염원은 약한자, 가난한 자, 눌린 자, 곧 민중이 가장 깊이 탄식하고 갈망하는 민중의 현실”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한다. 민중을 통일운동의 주체로 다시금 강조 한 것이다.

#북에 대한 인식 차로 발생한 통일운동 분열

1980년대 가장 큰 변화는 교회가 통일운동을 선교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80년 3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통일이 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이어 1986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통해 “분단이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모든 원수관계를 없게 하고, 화해의 대업을 성취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민족을 화해시키고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사명을 감당해야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교회가 처음으로 민족통일 문제를 신앙고백 가운데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어 교회협도 1982년에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치해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을 시작한다. 교회협과 회원교회들의 통일에 대한 관심은 마침내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88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 정책적 입장과 함께 통일을 위한 민간기구의 활동 보장과 남북한 경제 및 학술․ 예술․종교의 교류 등 구체적 통일과제를 제시했다.

하지만 88선언은 교회협과 회원교회들이 80년대에 이룬 통일운동의 결실인 동시에 보수적 기독교 진영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한국기독교실입인회 등은 88선언의 ▲민족주의적 낙관론 ▲미군철수 ▲남한사회와 남한교회의 분단책임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통일문제에 대한 이 같은 대립은 1970년대 이후 전개된 선교신학의 양극화와 더불어 북한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나타났다. 진보진영에서는 한국의 반공적 기독교가 통일의 길을 차단해왔다고 비판한 반면, 보수진영은 기독교인들의 전투적 반공활동을 국가에 대한 중요한 봉사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한국 기독교 내에서 두고두고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세계교회와 연대로 이뤄낸 도잔소회의

12․12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유신체제보다 더 폭압적인 수단을 동원했고 급기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국제적인 기독교 기구와의 연대를 통해 신군부의 반민주적 폭력을 고발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통일문제에서도 정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세계교회 및 해외교포교회와의 연대를 통한 접근이 주목을 받게 된다. 이같은 움직임은 1984년 WWC 국제문제위원회가 일본 도잔소에서 주최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 이른바 ‘도잔소회의’로 귀결된다. 도잔소회의는 남한교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을 초청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비록 조그련의 참석은 무산됐지만 이들은 회의를 축하하고 성공을 비는 전문을 보냈다. 이 회의에서 남한교회 대표들은 “세계교회협의회는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와 협력하여 가능한 한 남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대화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도록 한다”는 제안에 동의했다. 도잔소회의는 그 후 86년 남북 기독교인의 첫 만남이 이뤄진 글리온회의와 광복 50주년인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지키기로 선언한 88년 2차 글리온회의 , 그리고 1990년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 등으로 그 정신을 이어갔다.

▲ 1993년 8월 1일 남북인간띠잇기대회 참가한 성도들. 사진출처 새길교회 홈페이지

#반쪽짜리 통일운동 속 큰 성과

세계교회의 지원과 남북교회의 만남으로 고조된 통일 분위기는 마침내 1993년 8월 15일에는 서울 독립문에서 임진각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6만5천여명의 기독교인과 시민이 참여한 남북인간띠잇기 행사로 이어졌다. 남북인간띠잇기는 민중을 통일의 주체로 내세운 한국기독교 통일 운동의 상징적인 행사로 꼽힌다.

201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펴낸 ‘기독교, 한국에 살다’에서 저자는 “한국 기독교 통일운동은 주로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과 NCCK 회원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분단체제에 대한 책임소재, 감상적 통일지상주의, 통일 논의 일방주의, 북한체제에 대한 온정주의 등으로 압축되는 보수적 한국교회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 통일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점, 세계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통일에 대한 주변국의 인식을 환기시킨 점 등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보수 성향 통일단체

1990년대 들어서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남북교류를 법률로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북한이 겪었던 심각한 경제난과 자연재해는 북한 관련 기독교 시민단체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남한교회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어려웠던 1990년대 전반기에 인도적 차원에서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과 사랑의 의약품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북한 지원 사업이었다. 이것은 민간단체가 행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과거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진보적 단체와 달리 1990년대부터 조직된 북한 관련 기독교 시민단체를 이끈 것은 홍정길, 곽선희 등 보수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통일 대화나 통일 정책 보다는 북한 주민들의 경제적 곤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특히 1995년 여름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수해는 북한 관련 기독교 시민단체로 하여금 북한 주민의 생존 문제에 우선적 관심을 갖게 했다.

이때부터 북한 관련 기독교 시민단체는 개발 및 구호 단체의 성격을 지니게 됐는데, 남북나눔운동과 한민족복지재단,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유진벨재단 등이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이런 단체들의 활동으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남북교류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이 같은 상황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 한국기독교교교회협의회(NCCK) 교단 대표들이 2011년 11월 평양 봉수교회를 방문했다.

평화통일을위한기독인연대(상임공동대표 박종화 등 5명)의 최은상 사무총장은 “국내에 대략 대북 지원 단체만 100개가 넘게 있고, 이밖에도 북한과 관련된 인권단체와 환경단체, 성명서단체, 탈북자 송환단체, 교육단체, 연구단체 등 통일운동을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며 “이 같은 상황은 교회도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최 사무총장은 또 “단체들마다 가지고 있는 ‘주파수’가 다르다”며 “이들에게 한 목소리를 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기독교계가 통일을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기독교통일학회 명예회장인 주도홍 교수는 “인권운동을 하면 보수, 대북지원 하자 하면 진보라는 통념이 깔려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적 기준”이라고 지적했다. 주 교수는 “성경적인 차원에서는 인권운동이나 대북지원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며 “복음은 좌나 우,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념보다 상위에 있는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주 교수는 또 “독일의 통일을 ‘조용한 개신교 혁명’이라 부른다”며 “한국교회도 통일운동의 피스메이커로서 우리 사회 안의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시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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