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흘린 복음의 피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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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흘린 복음의 피를 기억하겠습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5.01.01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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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르포] 201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30주년, 양화진을 찾아가다

한국 기독교 선교 130주년을 맞는 새해가 밝았다. 1885년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파송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인천항)에 들어온 때를 기점으로, 한국 기독교는 어느덧 1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교회는 우리 근현대사만큼이나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실 1884년 의료선교사 알렌을 기준으로 하면, 130주년은 2014년이다. 그래서 한국교회 안에서는 이와 관련한 기념사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130년이라는 숫자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엄청나게 부흥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위기를 말하고 있다.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한국교회 전체가 골몰하고 있지만, 아직 답을 찾은 것 같진 않다. 어쩌면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점으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130년 전 조선 땅을 밟았던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에서는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 서울시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145명 선교사가 잠들어 있는 양화진 묘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양화진은 지하철 2호선과 6호선 합정역에서 내려 걸어서 5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 이미 겨울의 한복판, 천주교 절두산 성지와 마주하고 있는 양화진 묘원은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강변북로에서 이어지는 고가도로 아래에 위치해 꽤나 후미진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주차장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잘 조성된 공원에 온 것 같은 묘원이 나온다. 묘원에는 417명의 외국인이 안장돼 있으며, 선교사는 가족을 포함해 145명이 잠들어 있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차가운 날씨에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일 것이다. 언젠가 봄에 갔을 때는 새싹이 여기저기 피어 꽤나 온화했던 느낌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양화진을 방문하면 묘원에 가기에 앞서 가장 먼저 방문센터를 들러야 한다. 그보다 먼저 전화와 홈페이지를 통해 방문등록을 하면 해설사들의 설명을 누구나 들을 수 있다. 관람료는 없다.

방문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이드들이 언 몸을 녹이며 방문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랑방 같다. 우선 양화진을 이해할 수 있는 동영상을 시청한 후 본격적으로 묘원을 둘러보게 했다. 경기도 시흥의 경일경영정보산업고 학생들과 포항제일교회 교인들이 방문하고 있어 이들과 동행해 보기로 했다. 학생들 중에는 만학도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헤론 선교사

죽음을 넘어선 헌신, 대를 잇는 섬김

"헤론 선교사는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인물입니다. 미국 테네시대학 의대를 수석졸업하고 20대에 교수로 초빙됐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1885년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환자들을 돌보다 이질에 걸려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서운 바람에 소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해설을 맡은 김시내 청년(백주년기념교회)이 목소리를 돋운다. 어머니를 따라 약 2년 전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 영어 안내를 맡아왔지만, 이날은 우리말로 방문객을 인도했다.

각 묘소 묘소를 돌아보면서 무엇이 이 선교사들을 이 땅으로 인도했을까 하는 생각에 젖게 된다. 여전히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에서 죽을 각오를 하며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

양화진에는 가족묘가 여럿 있다. 선교사들은 홀로 온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있었고, 또 그 가족들이 희생되는 실로 엄청난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헌신은 대를 이어졌다는 것을 가족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1890년 약혼자 로제타 셔우드 홀과 평양에서 결혼한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만다. 로제타는 당시 임신 7개월. 29살에 남편을 여읜 그녀는 딸 에디스를 출산 후 다시 두 자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못 다한 선교의 꿈을 이어갔지만 딸 에디스마저 이질로 잃어야 했다. 하지만 로제타 홀은 선교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 매서워진 날씨에도 방문객들이 셔우드홀 가 묘비 앞에서 선교 사역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 에스더를 길러내고, 한국맞춤범에 맞는 점자법을 개발하고,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를 세웠고…. 아들 셔우드 홀 역시 조선에서 의료사역을 펼쳤으며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처음 만들어 보급했다.

제중원을 책임졌고 세브란스 병원을 세운 에비슨 선교사와 자녀들. 미국 장로교에서 파송돼 3대에 걸쳐 복음전파와 기독교 학교교육 등에 힘썼던 언더우드 선교사 일가, 미국 감리교에서 파송돼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닦은 아펜젤러 선교사와 그 자녀 등. 양화진은 바로 이런 숭고한 선교사들의 대를 잇는 헌신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방문해야 합니다”

양화진에는 이화학당을 설립한 한국 근대 여성교육과 여성전도의 선구자 스크랜턴 대부인,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해외에 알렸던 베델 선교사. 한국성공회 2대 주교로 YMCA 운동을 발전시키고 우리나라에 축구를 처음 보급한 터너 선교사 등. ‘이밖에'라는 표현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다.

▲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묘
▲ 아펜젤러 선교사 가족 묘비

 

 

 

 

 

 

 

 

 

 

 

 

 

 

이들 선교사들에 대한 해설을 양화진에서 직접 전해들을 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감사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올해 일흔의 안병례 할머니(경일경영정보산업고 3학년)는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선교사님들의 공로가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며 “선교사님들의 섬김을 잘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더 많이 양화진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한다.

학생들을 인솔한 안현주 교사(경일경영정보산업고 국어교사)도 “학생들이 잠시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선교사들의 삶을 기억할 수 있으면 해서 함께 오게 됐다”며 “학생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전했다.

교인들과 함께 온 정경옥 권사(포항제일교회)는 “레이놀즈 선교사, 로스 선교사들의 성경번역을 위한 오랜 세월의 노력은 지금도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며 “선교사들의 은혜에 눈물이 났다”고 소감을 전했다.

▲ 양화진홀에 들어서면 처음 보이는 문구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누구든지 일단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꼭 백주년기념교회가 마련한 프로그램에 따라봤으면 좋겠다. 아는 것만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 이름만으로 기억됐던 선교사들의 삶과 역사가 있다.

양화진 방문객을 꾸준히 늘고 있다. 2006년 처음 안내를 시작한 이래 2014년 6월 50만 명을 넘어섰다. 매해 방문객이 늘고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이 찾아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묘원을 둘러본 후 선교사들이 유물이 전시된 양화진 홀을 찾았다. 입구에 암흑배경에 조명을 비춘 “하나님이 조선을 이처럼 사랑하사”란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바닥에는 출렁이는 파도가 영상으로 보여진다. 선교사들은 어둡고 깊은 저 바다를 건넜으리라. 무엇이 그들이 저 먼 바다를 건너오게 했을까. 물질적 풍요와 권력이 넘쳐나는 지금의 한국교회는 이 질문에 먼저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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