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교회(한국 천주교)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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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교회(한국 천주교)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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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7.09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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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새남터에서 1846년 26세의 나이로 순교
▲ 조병하 교수

테르툴리아누스가 197년에 쓴 ‘변증서’를 통하여 “우리가 너희에 의하여 대량 사살 될 때마다 우리는 더욱 다수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씨앗이다.”라고 변증해야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시작할 때 유대교와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겪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로마 가톨릭교회 형성 초기에 역시 수많은 박해를 경험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변증하였다.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얼마지 않아서 1785년 유생들의 상소로 미사집전이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발각되어 서교의 정체가 들어났다. 예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 중 양반인 정약용 등은 훈방되었고, 중인 이었던 김범우만 체포되어 처음 순교자가 되었다. 권신일 등이 찾아가 자신들이 김범우와 같은 교를 믿으니 같이 처형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들을 단양으로 유배를 보냈다. 권신일은 유배지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1786년에 사망하였다.(을사추조적발 사건)

1791년에는 진산사건이라 일컫는 신해교난(박해)이 있었다. 조상제사 문제로 의례논쟁이 일어나 빚어진 박해로 중국에서는 70년간 진행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유교사회에 정면도전으로 보였다. 진산(현 충청도 금산?)에서 윤지충(진사, 1759-1791)과 권상연이 천주교의 제상금령에 따라서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하면서 이에 대하여 척사론자(가톨릭교회를 사악한 것으로 보아 물리치려 했던 주장자)이며 벽파(시파에 대립한 노론계열의 당파)이었던 홍낙안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정치쟁점화 하여 정조가 서학에 대한 극단적 대응을 경계하였음에도 결국 두 당사자가 죽은 것으로 끝이 났다.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신유교난이 1801년에 있었다. 11살의 순조의 등극과 사도세자 사건의 주역인 김구주(벽파)의 누이동생 이었던 정순왕후(경주 김씨)의 수렴청정이 이루어지면서 사도세자를 동정하였던 남인 시파는 정치보복을 당했고 이와 더불어 천주교박해가 있었다. 박해를 불러 일으켰던 주요요인 중 하나는 황사영 백서사건 이었다. 황사영은 정약전의 형 약현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1801년 2월 그리스도인들 체포령이 내리자 제천의 산골 옹기점 토굴에 숨어 중국 구베아주교에게 박해사정을 보고하였는데 이 백서를 10월 5일 왕이 친히 보고 그를 극악한 대역죄인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를 매국종교로 규정하여 더욱 탄압을 가했다.

백서에는 당시의 교세와 주문모 신부의 활동상황, 신유교난 때의 순교자들에 관한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백서는 1894년 무텔 주교가 입수하여 교황청에 보냄으로 교황청 국무성 고문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황사영은 1801년 11월 27일 능지처참(신체를 6등분함)의 형에 처해졌고, 가산이 몰수 되었으며 가족들은 유배를 갖다. 정약전을 비롯하여 300여명이 순교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서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등 400권의 책을 저술하여 조선 후기 실학의 최고봉으로 인정을 받았다.

1815년에는 을해교난, 1827년 정해교난에 이어서 1839년 기해교난이 있었다. 기해교난은 순조가 죽은 후 손자가 헌종으로 1834년에 즉위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정의 파벌 싸움 안에서 순원왕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다시 그녀의 후원을 받고 있던 천주교를 박해하였던 것이다. 1839년 3월 5일을 우의정 이지연이 천주교박멸을 주청하면서 교회 박해는 시작되었다. 유교가 정당하고 천주교는 부당하다고 쓴 글 척사윤음에 대항하여 정하상이 상재상서를 썼다. 정하상은 이를 통해 천주교가 이로운 종교임을 이해시키려고 변증한 글로 (한국교회 최초의) 변증서이다. 십계명과 부모공경의 신앙의 문제를 다루었다. 천주교가 국가에 충성하는 종교임을 역시 변증하였다. 정하상은 서소문 밖에서 1839년 9월 22일 톱으로 순교 당했다.

1846년에는 병오교난이 있었다. 7월 26일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1821-1846)이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당진군 강면 신종리 출신으로 조부와 부친이 모두 순교했다. 그는 새남터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 죽어갑니다. 여기에서 영원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라고 군중을 향해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1866년 1월에는 러시아 상선이 원산까지 와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러시아인들을 물러가게 해주면 신앙의 자유를 주겠노라고 프랑스 신부들에게 요청했으나 그들이 지방에 있어서 바로 응하지 못함으로 불만을 갖고 대신들이 대원군에게 서양 오랑캐를 모두 죽이라고 “진언”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일어났던 병인박해(1866-1873)는 가장 오래 지속되고 피해도 가장 컸던 박해이었다. 천주교는 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내었는데 그 중에 8,000여명이 이 박해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1863년부터 1907년까지 고종임금이 통치하였다. 1863년 천주교 신자는 19,748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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