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기독교, ‘남녀평등’ 외쳤지만, 종교적 권위로 무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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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기독교, ‘남녀평등’ 외쳤지만, 종교적 권위로 무력화”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4.07.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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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여성지도력개발원, 양성평등지도력을 위한 초청 신학 강연 개최

1920년대 기독교는 ‘남녀 평등’을 기치로 외치며 선전했지만, 이후에 젠더규범을 종교적 권위로 덧입혀 교회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감리교여성기도력개발원(이사장:조화순 목사) 주최로 지난달 26일 개발원 사무실에서 열린 2014년 여성 지도력 아카데미 ‘1920-30년대 기독교의 젠더정치와 한국교회의 대응’에서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하희정 교수(감신대/역사신학)는 “1920-30년대는 조선사회에서 남녀평등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라며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기독교계의 젠더 논의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 시기 기독교는 남녀평등을 외쳤지만, 결국 기독교가 만들어낸 담론의 배타성은 교회 여성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다층적 구조의 억압에 함께 저항할 수 있는 연대의 틀을 형성하는데도 한계를 갖게 했다”고 지적했다.

기독교는 근대 초기 무력화된 정부를 대신해 근대교육의 첫 포문을 열었다. 서구 선교사들의 종교적 동기로 시작된 학교 교육은 일제 식민 체제 하에서 조선이 근대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다.

아울러 선교 초기부터 다양한 선교활동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성해방의 종교’라는 특허를 어렵지 않게 선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서며 교회 안팎의 상황은 남녀평등이 더 이상 기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드러냈다는 것.

특히 하 교수는 “교회 안에서 남성중심의 제도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며 여성들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일반사회의 시각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며 “무엇보다 ‘여성해방’을 기치로 내건 ‘신사상들’의 유입으로 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새로운 상황에서 교회에서는 성차별적 요소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민낯을 드러냈다”고 진단했다.

이러한 대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해졌으며 기독교는 여성들을 해방으로 이끄는 전위가 아니라 낡은 전통에 가두는 구시대의 유물로 의심받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가 한 목소리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교 초기부터 ‘연합’과 ‘협력’을 통해 공동보조를 맞추었던 감리교와 장로교는 3.1운동 이후 새로운 변화에 맞닥뜨리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 교수는 비교적 여성문제에 열린 시각과 진보적 입장이었던 감리교와 대비해 전통적 위계질서를 중시해 여성의 활동을 제한했던 장로교의 역사를 설명하며 “젠더에 대한 논의는 시대변화에 대한 현실인식과 이에 대한 신학적 접근이 얼마나 달랐는지 유감없이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하 교수는 “기독교가 강조해온 ‘자발적 헌신’과 ‘이타적 희생’은 식민체제에 대한 비판적 자각을 해소시키고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탈정치화된 도덕이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며 “1920-30년대 기독교계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이 체제순응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 것도 기독교의 젠더정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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