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 이단일까 성령의 은사일까
상태바
신사도운동, 이단일까 성령의 은사일까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4.02.17 11:34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교회에 깊이 파고든 ‘신사도운동’ 분석Ⅰ,Ⅱ

신사도운동, 이단일까 성령의 은사일까.
한국교회에 깊이 파고든 ‘신사도운동’ 분석(Ⅰ)

한국 교회가 쇠퇴기를 맞이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전통적 오순절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이 한국에서 주춤하는 가운데 신사도운동이 성령운동의 계보를 이으며 체험적 신앙을 갈구하는 성도들 사이에 급속히 세력을 확산하고 있다.

개혁주의에 입각한 교단과 신학자들은 신사도운동에 대해 강력한 신비주의적 체험과 사도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이단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논란 속에서도 국내에서는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직간접적으로 신사도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침체된 한국 교회에 새로운 성령운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신사도운동이 개신교 주류 진영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얻고 있는 것에 반해 실제적인 신학적 연구는 아직 미흡하다. 기존의 것을 고수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한국 교회의 형태를 볼 때 신사도운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보다는 보다 체계적인 검증과 연구를 통한 영적 분별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사도운동의 뿌리

신사도운동은 교회성장학의 권위자 피터 와그너(Peter Wagner)가 2000년대 들어 교회 성장이 멈추었다고 진단하고 최근에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신사도 개혁’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시작됐다. 공식적으로는 2001년에 제2사도시대가 시작됐다고 천명하고 기독교가 위축되고 교회의 영성이 박해지는 것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운동이다.

개혁주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존 교회의 리더십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목회의 패러다임이 일어나야 한다는 사고에서 시작된 것이다. 방언과 기도, 영적 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오순절 운동과 비슷해 보이지만 보다 강력한 신비주의적 체험을 강조하고 이 시대에도 사도직이 존재하며 기존의 정통적 교회의 흐름을 개혁의 대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구별된다.

국내에서 신사도운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2000년대. 와그너가 저술한 신사도 관련 서적들이 한국에 번역되고 그가 수차례 방한해 직접 집회를 인도하면서 신사도운동이 크게 확산됐다.

#무엇이 ‘문제’인가

기존의 교회와 신사도운동적 교회는 어떤 차이점이 존재하며 신사도운동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을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은사지속론에 입각한 강력한 성령체험과 신비주의적 요소인 것으로 보인다.

신사도운동을 명백한 이단이라고 고발한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은 신사도운동에 대해 사도직과 선지자직, 극단적 신비현상, 직통계시에 의한 무속적 예언들, 이단을 포함한 개방신학, 지역귀신론에 근거한 영적 도해, 성령의 임파테이션(impartation, 일종의 ‘전이’로 번역됨) 등을 각종 사이비성으로 지적했다. 합동과 고신을 중심으로 보수적 장로교회에서도 지속적인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신사도운동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매김 하는 가운데 최근 기독교학술원(회장:김영한 박사)은 ‘신사도 운동의 영성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월례발표회를 열고 신사도운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시도했다.

김영한 교수는 “이단이란 교리적으로 사도신경을 거부하고 제도적 교회를 부인하는 집단을 말한다”면서 “오늘날 교회나 신자들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영적 현상을 귀신의 현상이나 점성술로 보는 것은 혹여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발제를 맡은 황덕영 교수(서울신대)도 신사도운동의 신비주의적 성령 체험에 대해 경계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성령운동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에 대한 위험 요소를 함께 지적했다.

국내에서 신사도운동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단체들에 대해 황 교수는 “기도나 신유운동 그리고 선교운동들 속에서는 성령의 역사로 보이는 성경적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면서 “그들을 모두 마구잡이식으로 이단으로 몰아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사람들이 21세기 이후의 새로운 성령운동을 비정통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스캔들”이라며 그 이유로 “웨스트민스터나 종교개혁은 그 당시에는 신비주의라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던 성령의 부흥운동에 의거한 새로운 영성운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며 단순히 새 것을 낯설어하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흐름에서 신사도운동을 비판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이러한 은사에 대한 현상적 논란을 넘어서 집중해야 할 것은 ‘열매’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건강한 성령운동의 증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한 배덕만 교수(복음신대)는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고 세상 속에 복음을 증거하는 능력을 받기 위함”이라며 “은사나 현상적 체험 자체가 성령운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복음을 전하기 위한 통로로 인식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사도운동의 건강성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흘러가기 위한 사역이 돼야 한다”며 “특정교세의 확대인지 단순한 체험이 중심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논란의 중심 ‘사도적 계시’

신사도운동에 대한 과도한 신비주의적 체험과 은사지속론이라는 개혁 신학적 차원의 비판의 가장 밑바닥에는 ‘사도성’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김영한 박사는 “개혁교회를 비롯한 공교회는 정경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사도적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성령의 지속적 역사를 인정하는 오순절 교단도 오늘날 사도와 예언자의 명칭을 인정하지 않지만 와그너는 이 두 직분을 인정한다”며 신사도운동에 대한 신학적 논란의 근본에는 ‘사도성’에 대한 이해에 있음을 설명했다.

황 교수는 “신사도운동에 대한 도덕적 실패나 신비주의란 고발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라며 “신사도운동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는 고유한 비판으로 ‘은사중지론’과 ‘사도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은사중단론에 입각해 선지자나 사도의 위임과 그에 상응하는 은사가 교회사에서 중단됐다는 입장에서 논평을 전한 이승구 교수(합동신대)도 “신사도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성서를 매우 자의적이며 경험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근원적으로는 예언이 지금도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직통계시처럼 여기는데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시대의 이적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사도적 이적과 같이 계시를 확정해 주며 선포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 교수는 “사도적 직분에 대한 개신교의 전통적 입장은 주께서 세우신 13사도(12+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뿐이고, 그 어떤 의미로도 사도적 인물의 계승이나 사도적 직분의 계승은 있지 않았고, 단지 사도적 가르침의 계승이 있을 뿐”이라며 “신약성경의 사도적 가르침에 근거해 볼 때 신사도운동은 근본적으로 사도적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와그너의 ‘사도성’에 대한 주장은 사도들의 계시를 대신할 수 있다는 개혁신학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하나의 새로운 리더십 유형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제시됐다.

서충원 박사(샬롬나비 사무총장)는 “만약 신사도운동에서 사도들이 성경의 계시와 동일한 계시를 받을 권위를 지닌다는 의미로 ‘사도성’을 이해한다면 당연히 이단으로 정죄돼야 한다”면서도 “이들이 말하는 사도성과 전통적으로 말하는 사도성과는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서로간의 대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밝혔다.

신사도운동, 이단일까 성령의 은사일까.
한국교회에 깊이 파고든 ‘신사도운동’ 분석(Ⅱ)

# 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사도성’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살필 점은 은사주의 운동에서 비롯해 신사도운동을 통해 활성화된 ‘5중 사역은사’에 대한 논란이다.

피터 와그너는 오늘날을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보며 ‘사도직의 현존성’을 주장한다. 교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고, 선지자는 예언하는 은사를, 사도는 사도라는 ‘영적은사’(gift)를 받았으므로 사도라는 ‘직임’(office)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즉, 신사도운동가들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근거해 ‘오중사역은사’로 △사도 △선지자(예언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다섯가지 직분이 현재에도 모두 존재한다고 본다. 이들 사역은사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 더해져야 본래 하나님이 계획한 신약성경적 교회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에 기반을 둔 신학자들은 신사도운동에서 ‘예언자’와 ‘사도’라는 두 직분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거세게 비판한다.

이승구 교수(합동신대)는 “신약 선지자(예언자)들의 영감이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쳤으며,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교사’의 직임 속에 편입됐다”며 “한마디로 오늘날에는 선지자가 없고, 오직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며 신사도운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날에도 직접적인 계시가 지속된다는 것은 최종 계시이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 다른 계시의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회장)도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사도 개념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보내신 자라는 의미”라며 “반면 와그너는 사도 네트워크를 통해 카리스마를 배양해 많은 사도들을 거닐 수 있을 때 감독 사도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가 카리스마를 배양해 종교적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매우 인간학적인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사도성에 대한 신학적 논의점으로 황덕영 교수(서울신대)도 “우리에게 거슬리는 점은 와그너 자신이 지적하듯 누가 사도를 사도라고 규정해 주느냐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신사도 교회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를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부정하고 자신의 운동만이 성령에 의해 지배된다는 특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사도운동이 또 다른 분파주의 내지 종교의 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교회의 전통과 비교해 신사도운동의 ‘사도적 계시’에 대한 이해에 면밀한 성서적 해석과 신학적 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로운 변화의 표지로 인식하자

이렇듯 각종 신학적 논란이 불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사도운동이 정상적인 교회에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신사도운동이 시대적 변화를 읽고 선점한 새로운 선교의 물결이라면?

이러한 의문에 황 교수는 “마치 종교개혁 이후 전통적인 교파 조직을 굴레로 여기며 수평적 의식이 등장한 것처럼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은 한 마디로 ‘새로운 교회형성 프로그램’”이라고 밝혔다.

그는 “와그너가 말하는 변화는 교회가 운영되고 사역이 이뤄지는 방식을 재구성한 것과 관련이 있다”며 “신사도 개혁이라는 선포는 자기들만의 독립교회가 가지는 경영과 자치권 행정의 자율성을 확보하겠다는 주장과도 맞닿아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와그너는 분명하게 신사도운동의 흐름이 교리의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성경의 권위나 이신칭의, 그리고 만인제사장직 등을 건드릴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기존 교회의 흐름에서 사도직과 연관된 새로운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기득권’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황 교수는 “와그너는 기존의 전통적 교회의 구조를 지금까지 유지하는 우리를 종교의 영으로 성령을 막는 자라거나 초대받지 못한 자들로서 사탄의 책략에 빠지는 자라며 비난한다”며 과거의 지도자들이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배덕만 교수(복음신대)도 “와그너가 신사도 개혁 운동을 선포한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 복음의 확산이 주춤하고 교회 내에 수많은 문제가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라며 현 교회의 생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근거해 신사도운동이 크게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와그너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지난 세기 쇠퇴하고 있는 정통 기독교 모습과 달리 번영하는 새로운 은사주의 교회의 형태에 맞춰 현 교회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이 바로 ‘사도적 갱신’이라고 설명한다.

황 교수는 “신사도운동이 사이비적 요소가 있을 수 있고, 사도성이란 주장 자체가 임의적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변화의 한 표지일 수도 있다는 점”이라며 “그것은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식 실용주의 기독교의 한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건강한’ 성령 운동 제시해야

다양한 성령운동이 한국 교회에 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흐름을 무조건 막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건강한 성령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한 한국 교회의 명확한 입장 정리가 요청된다.

김 박사는 “신사도운동이 비판받는 것은 기독교 선교의 핵심인 말씀 선포가 약하고 일부 소속 사도들의 행태에서 삶의 성결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렇다고 해서 신사도운동 자체를 성령운동이 아니라 부정하고 사이비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비판하고 제도권 교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 교회는 무조건적인 정죄보다는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 이들의 공과(功過)를 학문적으로 지적하고 바른 대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이 모든 성령운동을 함부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은사를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맥락에서다.

황 교수도 “명백한 점은 신사도운동이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가 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점한 것”이라며 “다가오는 새로운 성령의 선교에 복음적인 신학이 나타나도록 한국에서의 다양한 성령운동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최근 국내에서 신사도운동이 확산되는 것은 기존 전통 교회의 정체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배덕만 교수는 “기존 개혁주의에서는 성령운동을 비판하며 이단성에 대한 비판을 하지만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왜 기존 교회가 쇠퇴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라며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개신교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대안으로 그는 “무조건적인 이단 정죄나 비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건강한 성령운동으로 이끌 수 있는 답안을 가져야 할 것”이라며 보다 열린 대화를 촉구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ㄱㅁㄱ 2018-07-07 13:28:50
좋은글 감사합니다. 건강한 성령 운동을 기대합니다.

김희승 2015-08-26 12:24:54
긴 언급이 있었지만, 핵심은 와그너가 사도 네트워크를 통해 카리스마를 배양해 많은 사도들을 거닐 수 있을 때 감독 사도가 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성경에서 사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적 계승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명료하다. 사도행전 1장 15절 이하에서 베드로는 구약 시편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예언의 말씀대로 역사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다(1:16)"의 말씀은 시편 41편 9절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유다의 배반을 말하는 것이요, 이는 이미 요한복음 13:18절에서 주님이 밝히신 말씀의 내용이다. 이후 베드로는 시편 69편 25절을 인용하여 유다의 죽음 역시 예언의 성취였음을 밝힌다. 이후 베드로는 유다의 배반과 죽음 이후에 있을 일들에 대한 예언적 시편에 주목한다. 그것이 바로 시편 109편 8절에서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의 내용이다. 요약한다면 베드로 사도는 사도였던 유다의 배반과 죽음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그 유다의 사도의 직을 그 누군가가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안 것이며, 이에 자신들 가운데 한 사람을 세워 사도의 직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성경 어느 곳에도 주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 바울 외에 교회가 사도들을 계속하여 세워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라 언급 된 적이 없다. 또한 유다의 직분을 대신할 사도를 세움에 있어 베드로가 사도에 추천될만한 이로 정한 자질은 분명하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뎃서 올리워 가신 날 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게 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22)라고 그 자격을 못 박고 있다. 사도는 주님의 공생애 전부를 따라 다니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로 제한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를 세우신 그 주 목적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둘 다를 목격한 이로서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예외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세우심을 얻은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사도의 역할 역시 와그너가 주장하는 은사와는 관계 없다는 점을 베드로의 언급에서 분명히 할 수 있다. 사도는 계시를 전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명백하게 인식했던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이었다. 만일 사도들이 계시를 전하는 자들이었다면, 사도들 각각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 기록한 말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사명은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기존의 교회가 사도적 계승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이단적 주장이라고 밝히는 것은 기존 교회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함이 아니라, 이처럼 성경에 드러난 진리를 지키고자 함이다. 사도의 직이 "배양된 카리스마(은혜/gift)"에 의해 계승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는, 성경이 밝히지 않는 바를, 세상의 명성과 같은 유뮤형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것일 뿐, 이에 동조하는 자들은 명백히 말씀 외의 것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니, 영적 지도자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만일 사도 네트워크를 통해 사도가 배양될 수 있다면, 맛디와와 더불어 천거 되었던 바사바(행 1:23) 역시 사도로 세워도 흠이 없는 이였기에, 적어도 신사도 운동의 사람들이 "이 사도, 김 사도, 박사도" 할 정도면 그는 더욱 사도로 세워져야 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