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변증을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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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변증을 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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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3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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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이신론과 부흥운동
▲ 조병하 교수

영국교회도 17/18세기 초 계몽주의 확산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로 종교에 있어서 합리주의적인 발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의 온건한 형태는 이성적인 초자연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의 중심에 온전히 그리스도교 이신론 형태가 있었고, 그에 반해 과격한 무리들은 반 그리스도교 이신론으로 나아갔다. 이신론은 성서와 함께 계시의 신앙들의 하나님 이해에 반하여 이성적인 근거들로부터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을 묘사한다. 이신론의 선구자들은 에드워드 허버트(1581-1648) 이었다.

그는 그의 글 ‘진리에 대하여’에서 자연종교의의 토대를 제시하였다. 17세기 합리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존 로크(1632-1704) 역시 그리스도교 계시에 대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영국 경험철학의 고전적인 대변자 이었던 로크는 계시와 이성의 관계를 조화롭게 균형을 맞추었고, 그에게 진리는 초이성적이었고 반이성적이지 않았다. 1700년부터 영국 이신론은 점점 더 날카롭게 성서를 비판하게 되었다.

이신론은 창조신앙을 견고하게 붙잡았으나 하나님이 세상의 진행에 관여하는 것은 부정하였다. 영국 이신론의 대표적인 두 가지 저서들로 존 톨란트(1670-1722)가 1696년에 쓴 ‘신비하지 않은 그리스도교’와 마테우 틴달(1657-1733)이 1730년에 쓴 ‘창조만큼 오래된 그리스도교’를 들 수 있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파괴적 이라고 하더라도 무신론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장은 허구적이었고, 천박한 낙관주의였다.

영국에서 이신론에 대하여 반박하였던 사람은 윌리엄 로우(1686-1761)이었다. 그는 1732년 틴달에 대한 대답으로 ‘이성의 진상’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이성이 종교 안에서 진리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성은 인간의 감정의 혼란과 지성의 타락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신론에 반박하는 내용들을 다시 반박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사람으로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1711-1776)을 들 수 있다.

흄은 1748년 쓴 ‘철학 에세이’와 1757년 ‘종교의 자연 그대로의 역사’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다. 흄은 철학적으로 로크의 사상에 서 있지만 로크의 사상을 비판하고 종교적 회의주의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다. 흄에게 역사비평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 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변증을 자극하기도 하였고, 직접적으로 회의주의 사고를 촉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신론 논쟁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흥미 있게 전개되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였던 벤자민 플랭크린(1706-1790)과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집필자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은 이신론자들이었다. 반 그리스도교적인 이신론은 미국독립전쟁의 장군 에탄 알렌(1737-1789)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17세기 말 영국교회가 이신론의 영향으로 이성주의와 회의주의로 인한 논쟁이 깊어져 성공회, 비국교도 등 모두가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졌다.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사상에 침투함으로써 정통 그리스도교마저도 하나의 도덕적 체계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이신론을 반박하였던 조셉 버틀러(1692-1752)가 이러한 주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윌리엄 로우가 1728년에 영국교회의 개선을 위하여 쓴 ‘경건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진지한 부름’은 존 웨슬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영국 내에서 열정적인 신앙운동들이 일어났다. 1678년 런던의 젊은이들에 의하여 일어났던 ‘신앙단체들’이 그 예이다. 1700년경에는 런던에만 거의 100개에 달했다.

존 웨슬리의 아버지가 자신의 목회지 엡워드에 설립했던 단체도 이러한 단체들 중 하나 이었다. 필립 야콥 슈페너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 이외에는 슈페너의 ‘경건의 동료모임’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오래가지 못하여 1710년에는 눈에 띄게 쇠퇴하였다.

영국교회와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던 ‘복음주의 부흥’은 18세기 초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에벤에젤 어스킨(1680-1754)과 랄프 어스킨(1685-1752) 두 형제가 1714년경에, 1735년경 웨일즈에서 호웰 해리스(1714-1773)와 다니엘 로우랜즈(1713-1790)가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1726년 웨슬리의 동생 찰스는 옥스퍼드 대학에 작은 모임 ‘신성 크럽’을 결성하였다. 처음에는 이 모임은 공부를 위한 것이었으나, 1729년 말 웨슬리가 옥스퍼드로 돌아와 지도자가 되면서 윌리엄 로우의 경건하게 헌신된 삶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1735년 초에 이 클럽에 조지 휫필드가 가입하였다. 그리고 세 명의 위대한 지도자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가 주도하였던 영국 복음주의 운동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웨슬리 형제의 감리교, 휫필드의 칼빈주의적 감리교, 그리고 좀 더 전통적인 교구의 흐름을 따랐던 영국 국교회의 복음주의 교회가 40년간 서로 뚜렷이 구별되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국국교회와 관련을 맺고 발전하다가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된 것은 1779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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