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루터, 95개 논제 통해 진정한 참회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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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루터, 95개 논제 통해 진정한 참회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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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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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47)

개혁의 도화선: 사면에 대한 반박문(95개 논제)

▲ 백석대 역사신학
1517년 10월 31일 밤, ‘모든 성인의 날 대 축제일’(11월 1일) 전날 밤에 마르틴 루터가 대학의 관례에 따라 신학적인 논쟁을 원하여 라틴어로 작성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의 교회 문에 내 걸면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더(1459-1530, 마르틴 루터가 루더를 루터로 바꿈)와 어머니 마가레테 루더(린데만)(1459-1531)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이듬해에 가족들은 만스펠트로 이사하였다. 19살 이었던 1501년에는 에르푸르트 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하였고, 1505년에는 인문학부를 마치고 법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루터의 삶의 변화는 1505년 7월 2일 만스펠트에 부모를 방문하고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스톳테른하임 가까이에 이르러 벌판에서 무시무시한 낙뢰를 만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광부들의 수호성인이었던 성 안나의 이름을 부르며 수도사가 될 것을 서원하게 되면서 일어났다. 그는 같은 해 7월 15일에 에르푸르트에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 소속의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루터는 1508년 자신의 고해신부 요한네스 폰 스타우핏쯔를 통해 신학공부를 권면받았고 이를 위해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루터는 개혁을 위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스타우핏쯔의 영향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통하여 성경과 교부들을 공부할 것을 권면 받아 그대로 하였던 결과였다고 말한다. 비텐베르크에서 한 학기 공부한 후 수도사이었던 루터는 다시 에르푸르트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1511년 9월 다시 신학박사를 위하여 지원하였던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옮겨갔다.

루터는 그곳에서 1512년 10월 신학의 박사 학위를 받았고, 폰 스타우핏쯔와는 그가 잘쯔부르크로 루터와 결별하고 떠날 때까지 밀접하게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루터가 개혁과정에서 결별하기 아쉬워했던 사람들로 에라스무스와 스타우핏쯔를 들 수 있겠다.

루터가 1512년 10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자 스타우핏쯔는 1502년 비텐베르크대학을 설립한 이래 줄곧 맡아왔던 ‘성서의 교수직’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루터는 시편강해(1513-1515), 로마서 강의(1515/16)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신학을 발견하기 시작하였다. 1515년의 로마서 강의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서 1:17에서 그는 의롭게 되는 일을 위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고 그와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신비주의자 요한네스 타울러의 영향이 있었음을 밝힌다.

루터는 앞서서 1517년 9월 4일 ‘스콜라신학에 대항하여’라는 논박을 통해 오랜 중세신학에 영향을 끼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논박하기를 원했으나 사람들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10월 31일에 당시 사면신학이 잘 못되었음을 반박하기 위하여 95개 논제의 반박문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는 매우 거대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95개 논제를 통하여 루터가 반박에 집중했던 사면신학은 소위 베드로의 사면이었다.

이는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513)가 베드로성당 신축을 위한 재정확보 수단으로 활용하였고, 루터 당시에 교황 네오 10세가 이를 지속하였다. 교황이 독일에서 이러한 일을 마인쯔의 알브레히트 추기경에 위임하였고, 사면의 실천적인 실행은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 수도사였던 요한네스 텟젤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사면을 위한 조건으로 사면부를 팔았다. 행정적으로 95개 논제는 알브레히트에게 전해졌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는 대학보고서에 논박이 있었음을 보인다. 루터의 논제는 게시된 지 2주 후에 전 독일에 유포되었다.

“상자 속에 던져진 동전이 울리자마자 한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천국으로) 날아오른다.”(논제 27항)라는 선전어는 반년 후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거부되었고, “거짓되고, 수치스러우며, 지지할 수 없다”고 까지 말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사면신학이 중세 후기의 교회들이 알지 못했던 것으로 사면이 참회의 성례 마음의 참회(찢음), 입의 고백(이 후에 고해신부로부터 사죄의 선언이 있다), 행위의 만족(보속) 중 만족(보속)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사면신학은 죄들이 사죄의 선언을 통하여 용서받은 후에도 사면을 통하여 용서될 수 있는 교회의 형벌이 남는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이와 같은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영향으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와 아크비노의 토마스와 추종자들에 의하여 가르쳐졌고,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이에 루터는 논제를 통하여 진정한 참회를 강조하고 사면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발견한 ‘오직 은혜로’라는 그의 신학이 반박문에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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