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발한 사회사업으로 교회의 존재이유 세상에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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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 사회사업으로 교회의 존재이유 세상에 보여줘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3.06.1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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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정전협정 60주년, 이제는 평화다 ① 한국전쟁, 그곳에 교회가 있었다

▲ 한국전쟁으로 남북한 교회는 인적, 물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고난의 현장에서도 세상을 돕는 교회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50년 9월 27~28일 양일간 공산폭도들에 의해 학살당한 병촌교회 신자 66인의 순교기념탑(왼쪽)과 현재 병촌교회 모습
지난 1953년 7월 27일 남북한 당국은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전쟁을 정지시킨다는 목적으로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적대행위와 일체 무력행위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60년이 지난 현재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위협’이라는 두려움과 공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실험과 3차 핵실험, 그리고 한미 양국의 ‘키 리졸브’와 ‘독수리연습’ 강행은 한반도를 극도의 경색국면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결국 민족화해와 경제협력 등 남북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 사업도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최근 북한의 남북당국간 회담 제의는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해소시킬 것으로 기대됐지만 북한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이마저도 결렬됐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의 근간으로 알려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이루어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분단 해소와 평화정착은 국가와 사회뿐만 아니라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한국 교회에도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지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교회와 사회가 어떤 노력을 전개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전쟁 속에서 인적ㆍ물적 피해 입어
외원단체의 지원 속 다양한 구호활동 전개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 담당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했지만 한반도의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했다. 당시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에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장애가 되는 사람들의 경우 회유 내지 숙청을 단행했다.

# 해방이후의 한국 교회와 6.25 전쟁
소련이나 김일성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북한 교회였다. 윤하영,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신의주에서 1945년 9월 기독교사회민주당이 결성되기도 했다. 사실 북한 교회는 해방을 맞아 새나라 건설과 관련된 정치단체를 결성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했다.

북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한 정당 중 가장 큰 정치집단은 조선민주당이었다. 1946년 11월 평양에서 조직된 북조선기독교도련맹(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북한 교회들을 이끌어가며,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통합해 ‘평양기독교신학교’로 개칭하고,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직후인 1950년 7월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더 이상 운영되지 않았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적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는 신앙과 예배에 국한됐다. 이마저도 당국의 감시와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북한 교회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북한을 공산화하려는 소련 군정의 음모에 일조하거나 신앙의 양심을 지켜 순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지만, 고난과 순교를 길을 선택한 이들이 많았다.

반면, 미국 군정을 통해 남한 교회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부흥을 경험했다. 한국말과 한국문화에 익숙한 선교사와 선교사 2세들은 미군정과 교회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부터 다양한 정치 집단들과 세력이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의 위상과 풍부한 인적자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당시 남한 교회 지도자들이 우파, 좌파, 중도 성향으로 나뉘어 지나칠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은 피해갈 수는 없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은 사실 미국과 소련 두 나라의 냉전체제 속에 편입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이데올리기 전쟁으로 확대됐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교회와 동포들 사이에서 극심한 적개심과 증오를 심어줬고, 인적, 물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피난을 떠나지 않고 남한에 머물러 있었던 해외 선교사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순교했다. 전남 영광군의 야월교회와 염산교회,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이 수십 명 단위로 좌익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으며, 미군의 북진 과정에서 황해도 신천은 가장 많은 주민들이 집단 학살당한 곳으로 기독교인을 포함한 반공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전세의 변화에 따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을 감행한 아픔과 고통의 현장으로 남아 있다.

# 교회의 구호활동
무엇보다 한국전쟁 전후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피폐해진 영혼들을 위로하고,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줌으로써 교회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여과 없이 보여줬다. 고난의 현장에서 동일한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다양한 구호활동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당시 전쟁으로 남한 인구의 절반은 구호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나 대부분의 민간 단체는 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이때 외국 정부 및 외국 민간단체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됐다. 외국 민간단체의 경우 대부분 유럽과 북미의 교회 및 기독교 구호단체들로 구성됐다.

1950년 10월에 ‘한국구호’를 협의하기 위해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선교협의회(IMC), 기독교세계봉사회 등 대표적인 국제 종교기구 대표들이 미국 뉴욕에 모였고, 한국에 공식적인 ‘기독교구호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이후 1951년 2월 미국의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 구호 책임자로 아펜젤러(Henry D. Appenzeller)가 내한해 부산에서 개신교의 구호활동 감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구호활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김흥수 교수(목원대)는 “이 시기에 내한한 구호 단체들은 주로 전재민 응급구호, 고아원 운영, 해외 입양, 전쟁미망인 원조, 주택 복구, 교육, 보건의료, 지역사회 개발 등의 사업을 전개했다”며 “한국에 구호단체를 보낸 해외 기독교 교파는 장로교, 침례교, 나사렛교회, 메노나이트, 퀘이커, 동양선교회, 감리교, 루터교, 가톨릭 등 매우 다양했다”고 설명했다.

전쟁미망인의 수가 30여 만 명에 달하자 기독교 외원 단체들은 미망인 시설 건립 지원 및 운영비 보조, 뜨개질 같은 기술교육, 소비성 물품 공급 등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 기독교세계봉사회의 지원으로 경남과 부산, 서울 등지에 미망인 시설이 건립됐다.

한국 교회 감리교 여자관과 사회관,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여러 기독교 여성 단체들도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보호활동을 벌였고, 취업을 알선하기도 했다.피난민 정착사업과 급식구호 활동도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기독교세계봉사회와 구세군은 피난민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개설해 오랫동안 운영했다. 피난민들의 의료 및 건강을 돌보는 일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의약품ㆍ의수족 제공, 산파교육, 결핵퇴치 등에 힘을 기울였다.

이밖에 맹아 및 농아 사업, 양로원과 탁아소 운영, 농촌개발 사업 등 외국 교회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한국 교회는 역사상 가장 활발한 사회사업을 전개했다. 김 교수는 “비록 대부분의 구호활동이 외국 구호단체들에 의해 주도됐지만 한국 교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한국 교회 성도들은 구호활동과 사회봉사의 현장에서 많은 사역을 펼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외국 구호단체의 구호품 분배 과정에서 한국 교회 안에서 부분적으로 다툼이 발생했고, 미군의 참전, 전시 및 전후에 미국 교회 및 정부가 제공한 많은 구호품과 원조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한국 교회가 친미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는 등 외국 구호단체의 원조는 한국 교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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