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원 확보보다 교회, 국가의 역동적 관계에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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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원 확보보다 교회, 국가의 역동적 관계에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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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3.2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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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호 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종교인 납세자 문제는 지난한 해 교계를 달군 뜨거운 감자였다. 그런데 최근 기획재정부가 교인 과세 추진 계획을 유보함에 따라 찬반을 둘러싼 논쟁이 일고 있다.
경실련은 최근 이와 관련 ‘종교인 및 종교법인 과세의 쟁점과 개선방안’이란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관련 쟁점 사안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토론회에서 종교인 과세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의 주장을 정리해 실었다. <편집자 주>


교회 혹은 목회자 납세에 대한 문제는 단지 하나의 조세항목을 검토하는 일이 아니라, 서구 사회가 오랫동안 진통을 겪어 온,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요구되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따라서 특정 종교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을 배제하고 좀 더 원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사안을 두고, 국가나 교회에 더 이익이 되느니 비교하는 접근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부수적이며 본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교회에 대한 성경 가르침과 납세에 관한 국법규정이 어떻게 본연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지금 필요하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교회 및 목회자에 대한 비과세는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정립돼 60년 이상 시행된 일종의 불문법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와 충돌하는 입법을 발의 하려면 먼저 종교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신학적이거나 법학적인 전문 의견을 청취하고, 종교인들과 일반인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등 적정 공개적 절차에 우선 따라야 할 것이다.

교회는 본질상 영리를 추구하는 모임이 아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서 이익을 버리는 자기부인의 모임이다. 초대 교회 이후 교회의 헌금은 구제가 주요한 목적이었다. 막스 베버가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의 토대를 놓았다고 본, 종교개혁자 칼뱅은 교회 재정의 4분의 1은 교회 바깥의 사람들을 구제하고, 또 4분의 1은 교회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4분의 1은 목회자와 교역자의 사례비로, 그리고 4분의 1은 교회 유지 등을 위하여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교회는 이미 조세의 이상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은 자신의 사례비 중 30-50% 정도를 교회에 헌금하고 있고, 두 벌 옷을 갖지 말고, 전대를 갖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청빈한 생활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마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종의 경계 논리로 그들의 삶을 산다면, 절대 목회자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직자 납세를 반대하고 현행대로 고수하기를 원하는 측은 성직자들이 받는 사례는 노동의 대가로 지불되는 임금이 아니라 일종의 은급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도들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납세를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친 헌금의 순수한 용처에 또 다시 과세를 한다는 것은 이중과세의 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헌신으로 교회는 한국 사회에 선한 기여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이 부분이 왜곡되는 세태가 우려된다. 잘못된 몇몇 교회의 현상을 두고 해결의 실마리를 삼지 말고, 교회의 본질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은 성직자 납세를 논할 때가 아니라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구현해야 할 때다. 이것은 문제를 먼저 경험한 서구 국가들의 근래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종교가 내적으로 더욱 견실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정부는 세원확보에만 주력하는 단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국가와 교회의 역동적인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단지 강제조세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이 정치의 바람으로부터 완전한 제 3의 지대에서 마음껏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인권ㆍ구제ㆍ복지ㆍ문화 영역 등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고, 할 마음도 안 생기는 현실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교회는 자율적으로 일부를 사회 구제를 위해서 쓰고, 나머지 일부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일종의 거룩한 의무와 같이 여겨야 할 것이다. 결국 교회가 교회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교회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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