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사랑과 자비,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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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랑과 자비,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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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1.13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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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아름다운 영성이 숨 쉬다 (10) - 안용준 목사(목원대 겸임교수)

거룩한 사랑과 자비,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고요한 침묵 속에 말할 수없는 사랑의 숨결이 화악 밀려온다. 우리의 섬세한 사랑의 세포들이 샘솟듯이 반응하는 순간이다. 마치 아버지의 용서의 자리에 우리가 초대된 느낌을 받는다.

이 그림은 아버지와 다른 나라에서 집에 막 돌아온 둘째 아들이 따스한 빛을 받으며 끝없는 사랑을 나누는 장면(누가복음 15:11~32)을 그린 것이다. 이아들은 아버지의 곁을 떠날 때만해도 부잣집 자손의 신분에 걸맞게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누더기에 가까운 속옷 차림이다. 다 닳아 너덜너덜해진 신발에는 고단한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어느 모로 보나 그의 행색은 냄새나고 나약한 거지에 가깝다.

렘브란트는 이 탕자에게서 ‘수치 속에 가려진 사랑스러움’(a loveliness hidden in shame)을 발견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의 눈은 인간의 죄를 보지 않으려는 듯이 눈이 감겨져 있다. 아버지에겐 아들의 누추한 모습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는 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들이 짊어진 삶의 고뇌까지도 받아들이려는 은혜의 광휘를 발산하고 있다.

▲ 돌아온 탕자(1661~1669)
한편 큰 아들은 화면 우편에 지팡이를 짚고 잔뜩 심통 난 표정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투정과 동생에 대한 질투가 그대로 묻어있다. 장남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동생을 환영해야 함에도 아버지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만다. 큰 아들 곁에 금박 모자를 쓰고 다리를 꼬고 앉아 관심 있게 바라보는 인물이 재산관리인이다. 기둥에 기대고 얼굴을 삐쭉 내밀고 있는 인물이 시종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멀리 있는 아들을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와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췄다. 세속적 위안과 쾌락에 빠져 모든 것을 탕진한 수치스런 아들이었다.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버림받은 자였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덥석 껴안은 것이다.

단순히 호구지책으로 아버지를 찾았던 둘째 아들은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는다. 가족을 매몰차게 떠났던 자신을 책망하지도 따지지도 않은 아버지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창녀들과 욕망에 빠졌던 자신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너지고 만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로 꽁꽁 얼어붙었던 그의 마음은 일순간 녹아내린다. 거룩한 사랑과 자비에는 죽음을 생명으로 이루어가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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