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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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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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9.2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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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근 목사 (이수중앙교회)

우리는 2003년 대구 지하철에서 발생한 끔찍한 테러사건을 까마득하게 잊고 산다. 김대한 씨는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실어증과 우울 증세를 보이며 신병을 비관해 오다가 드디어 자살을 기도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모두 부조리한 세상과 이웃에게 돌렸다. 왜 나는 불행한데 너희들은 행복하냐는 거다. 그래서 분신자살 장소로 지하철을 택한 것이다. “나만 죽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인간에겐 묘한 심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형제가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보다도 불행에 빠졌다는 이야기 듣기를 더 좋아 한다. 누군가를 욕하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이야기 보다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의보다 불의를 더 기뻐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마음속에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기숙하고 있는 이 사악한 것, 이 불의를 추방하지 않는 한 우리는 대구 지하철 사건과 같은 참사를 이 땅에서 추방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제2, 제3의 김대한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김대한 씨를 욕하고 모멸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 사악한 불의를, 기뻐하는 마음을 슬퍼하며 회개해야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원수들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그들이 망하기를 바란다.

특히 종교인들이 그렇다. 요나를 보라. 그가 왜 “니느웨에 가 회개를 외쳐 구원하라”는 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친 것인가? 그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가 죄악에 빠져 망하길 바랐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회개시켜 구원하라고 하니 죽도록 싫었던 것이다. 원수가 불의를 범하고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도 나쁘지만, 형제의 불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더 나쁘다. 가인을 보라. 그가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가? 만일 동생 아벨이 불의한 제사를 드려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았다면, 죽였겠는가? 통쾌하게 웃었을 것이다.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위로해주었을 게다.

그러나 동생 아벨이 의로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미워서 죽였다. 사람들은 왜 형제가 불의를 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일까? 왜 형제가 잘되면 배가 아프고, 잘못되는 것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고소하고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인간성의 가장 치사한 부패성을 드러내 준다. 그것이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뿌리 깊은 악이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자기 자신의 불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비참함을 이렇게 탄식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 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롬 7:19~24) 지금 바울은 죄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있다.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쳐 보지만 소용이 없다.

이러한 인간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누가 이 비참한 나를 해방시켜 주는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안에 거하면 된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형제의 불의도 자신의 불의도 원수의 불의까지도 기뻐하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런데 말이다. 슬프게도 그렇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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