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총회서 선교사 파송 복음수출국 성장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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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총회서 선교사 파송 복음수출국 성장 밑거름
  • 승인 2002.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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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개신교 첫 총회가 열린 때는 지난 1912년 9월2일이다. 이날 오전 9시 평양신학교에는 충청노회, 전라노회, 경상노회, 함경노회, 남평안노회, 북평안노회, 황해노회 등 7개노회 대표 총2백21명이 모여 역사적인 장로교 첫 총회를 성수했다.
선교사 44명과 우리나라 목사 52명, 장로 125명이 그들.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공교회 조직을 설립한 것인데 1회 총회장에는 언더우드선교사(원우드목사), 부회장에는 길선주목사, 서기에 한석진목사, 부서기에 김필수목사, 회계 방위량목사, 부회계 김석창목사가 각각 초대 임원을 맡았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목사 128명에 장로 225명 강도사 6명, 조사 230명으로 나타났으며, 세례교인 5천4백31명으로 총12만7천228명이 1천4백38개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교회규모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과 10여년 사이에 예배당 수 증가나 복음화율이 상당히 높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1회 총회 때 결의한 안건은 총7가지.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미약한 교세에도 불구하고 중국 산동성에 총회 파송선교사 3명(박태로·사병순·김영훈목사)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각 교회학교에서는 성경과목을 필수적으로 넣기로 하는 한편 교인 혼인연령도 여자는 만15세 이상, 남자는 만 17세 이상으로 정해 사회질서를 세웠다. 선교사 파송결의는 생각보다 매우 단순했다.
외국 선교사가 전달한 복음을 ‘댓가없이 거저 준다’는 의식이 강했던 것. 1913년에 파송된 3인의 선교사에 이어 1917년과 1918년,1919년, 1923년, 1931년, 1937년 등 수십차례에 걸쳐 선교사를 파송, 의료사역과 복음 구령사역을 감당했다.

역대총회 중 눈에 띠는 총회로 ‘1931년의 제20회 총회’를 꼽을 수 있다. 9월11일 열린 20회 총회 장소는 ‘금강산 수양관’. 한국교회 힘으로만 건립된 금강산수양관은 설립 이후 감리교총회와 여전도회 총회, 전국교역자 수양회를 비롯 금강산관람객이 꼭 들르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금강산 온정리 외금강 한하계 사다리골 삼각주에 위치한 8천평 대지 위에 2층으로 된 총2백28평으로 동해를 바라보는 위치에 세워졌다.
1924년 13회 총회 때 한남노회가 발의했고 14회 총회에서 건축위원회를 조직한데 이어 15회 총회에서 총독부로부터 10년 기한으로 토지를 대부받아 건물을 설립, 1931년 20회 총회로 모이게 된 것이다. 교세가 활성화되고 독립운동이 커지자 일제는 1941년 금강산 수양관을 철거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감리교회는 미국의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대립으로 자칫 ‘두개 총회’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호소와 미국 감리교회의 생각이 일치돼 ‘합동총회’로 첫 발을 딛게 됐다.

1930년 12월2일 기독교 조선감리회 제1회 총회가 열린 것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 날 총회에는 미국 남·감리회 대표가 참석, 조선감리회 총회가 교회조직과 치리전권이 있음을 공식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8일 양주삼목사를 총리사로 선출했다.

한국교회 역대 총회 결의 중 가장 치욕스런 결의는 ‘신사참배 가결’이다. 일제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를 압박, 1938년 2월9일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하도록 했으며 급기야 장로교 27회 총회(1938년 9월10일)때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으로 허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종교적으로 우상숭배를 인정함은 물론 일제의 식민지배를 용인한다는 뜻으로 나타났다. 총회가 열린 평양 서문 밖교회에서는 “불법이요! 항의합니다!”라는 고성이 나와 일본경찰이 연행하는 사태가 이어졌다고 교회사가들은 기록에 남겼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치욕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4월23일 제39회 총회에서 ‘시산참배 결의 무효화’를 전격 결의했다. 이미 해방직후인 1946년 북한교회가 빠진 상황에서 진행된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삭제’를 결정했었다.

39회 총회는 당시 총회가 반쪽총회였기에 다시 한번 그 결의를 확인한 것이다. 안동중앙교회에서 열린 39회 총회는, 이외에도 전국무교회지역에 교회개척운동을 결의, 총회부흥단을 조직하는 등 복음화운동 전개를 추진하게 된다.

교회수가 늘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신학·신앙의 성향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 1954년 6월10일 김재준박사를 중심으로한 기독교장로회가 출범하고, 이어 세계교회협의회 참여여부에 따라 예장 합동·통합총회가 양분되는 시기를 겪는다.

기장측은 38회 총회에서 그리고 합동·통합측은 제44회 총회(1959년 9월24일)에서 분립이 선언됐다. 이후 1979년을 지나면서 장로교 총회는 무수한 총회로 격렬한 분열을 낳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윤영호차장(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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