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언론의 사명
상태바
기독 언론의 사명
  • 운영자
  • 승인 2011.01.26 15: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엽 목사<기독교정화운동 대표>

언론의 발전은 인간의 성장에 비할 수는 없지만 23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은 그만큼 노련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욕의 세월이 흐르고 번뇌의 세월도 있었을 것이며 칭찬과 부끄러움의 세월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기독교연합신문은 이렇게 해서 알게 모르게 한국의 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깨끗한 이미지로 공헌을 크게 했다고 자부한다.

신문이란 새로운 소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빨리 알려서 사회를 바로 잡아간다는 의미가 주된 임무라고 생각을 하는데 재야에서 빚어지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가려서 알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사회의 품위 있는 윤리와 도덕 및 철학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설이나 주장들은 올곧고 뜻이 높아야 할 것이고 또 분별 있는 지사들의 의견을 아낌없이 피력해 주어야 할 것이다. 똑똑하고 분별 있는 인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밝게 발전할 것이다. 또 국민은 더 안전하고 균형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기독교 언론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한국 교계는 타국에 비하여 넓이가 큰 만큼 그 사명도 크다 할 것이다. 현재 기독 언론들의 논자들은 많은 의견과 논지들을 피력하여 나름대로 많은 공헌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칫 그 의견들이 시중에서 피력하는 의견들의 수준에서 그친다면 어찌 만족할 수 있으리요. 기독교는 인간의 집단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단이며 성경에 입각한 진리를 따라가는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이어야 하고 진리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진리적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하다면 낙제일 수밖에 없다(롬 10:2).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논자들이 될 것인가?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등 대선지자나 소선지 할 것 없이 모든 논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의 명령을 따라 그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에레미야 때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있어 아첨하는 예언을 해서 왕들과 제사장들을 강하게 하려 하였고 격려하려 하였으나, 예레미야는 여지 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외쳐 말함으로써 미움을 받고 죽음을 겨우겨우 피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거짓과 참을 무엇으로 분별해야 했던가? 분별의 기준도 없었다. 그 이루어지는 역사가 진위를 가릴 뿐이었다.

거짓 선지자일수록 더욱 더 달콤한 말로 백성들을 유혹하였고 백성들은 그들의 말을 더 따랐다. 오늘날 교계를 향하여 교인들을 향하여 가차없이 쓴 소리를 뱉어내고 꾸짖고 옳은 길을 제시하는 형안의 지사가 얼마나 있는가? 하나님은 그런 논자들을 찾으실 것이다. 교계의 정치계를 보나 교회계를 보나 탐욕과 비진리들이 횡행하고 날뛰며 반성이나 회개는 전혀 없이 후안무치의 인사들이 돈을 앞세워 자신 있게 일을 해 나가는데도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따라가며 박장대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안되니까 포기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교계지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인사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도 어디엔가 이 세대를 탄식하며 울고 있는 종들이 어디 구석에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리게 하는 것이 기독 언론의 사명이다. 세대를 따라가되 영합하지 않아야 하며 세대와 함께하되 그들에게 짐을 부탁하지 말아야 한다.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하나님의 축복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돌보시지도 않으신다.

이 세대에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서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갈까 하는 고민에서 몸부림치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