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77강) “가시채를 뒷발길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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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77강) “가시채를 뒷발길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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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7.2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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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의 바울의 설교

이제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변론을 통해 오히려 복음을 증거한다(행 26:1-23).
여기에 수록된 바울의 설교는 일찍이 그 지상 사역 중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성취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눅 21:12) 이 설교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아그립바의 호의를 기대하는 인사말이 나온다(2-3절). ② 자신의 유대적 배경을 요약한다(4-8절). ③ 자신이 일찍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음을 밝힌다(9-11절). ④ 자신의 회심을 설명하되 그보다는 오히려 선지자적 소명 혹은 신적 위탁의 성격을 소상하게 설명한다(12-18절). ⑤ 자신의 선교사역을 간단하게 요약한다(19-23절).

이 설교의 절정은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죽은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바울이 주장한 것이었다(행 26:23). 이처럼 바울의 변증설교는 철저하게 기독론에 근거했던 것이다.

아그립바는 분봉왕으로서 성전금고와 대제사장의 서임(敍任)을 관장했으며, 대제사장을 임명할 수도 있었다. 로마인들은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는 그와 상담하였다. 이로 인해 베스도는 그가 바울을 평가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바울의 이 설교는 그의 강력한 웅변술의 백미(白眉)이다. 아그립바에 대한 깍듯한 인사로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피력하였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은 이러한 바울의 연설에 압도당하게 되었다.

이 설교에서 바울은 사도행전에서는 세 번째로 자신의 회심을 설명한다(참고, 행 9:1-9; 22.6-11). 이 세 기사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기사가 본래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했는가, 또는 바울 자신이 얼마만큼 사후의 체험의 견지에서 이를 표현했는가에 관해 사색하는 것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 기사 사이에는, 기사들 자체 속에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에 기록된 바울의 자서전적 진술을 통해 볼 때, 일반적인 공통점이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길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2)는 구절은 앞의 두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황소가 자신을 해롭게 할 뿐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쓸데없는 저항을 일컫는 헬라의 속담이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마부(馬夫)에게 뒷발질하는 거친 황소를 묘사하는 것이었는데, 회심하기 전 나사렛 이단을 핍박했던 자신의 행동의 의미에 대해서 바울이 고민했던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26:15) 해보다 밝은 빛 가운데 들려진 음성이 하나님임을 깨달은 바울은 사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자신을 칭찬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칭찬은커녕 오히려 자신이 주님을 핍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바울의 믿음과 사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은 분명히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남다른 열심으로 애써왔는데,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열심히 섬기는 주님을 핍박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신앙적 사고에 일대전환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이제까지의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각성과 함께 열렬한 그리스도의 추종자 및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 (행 26:20) 만일 이 말이 이 설교 전까지 자신의 선교활동의 지역적 범위를 대략적으로 요약한 것이었다면, 이것은 옳다. 다메섹, 예루살렘, 유대 그리고 이방세계. 그러나 갈라디아서 1장 18-22절과 대조해 볼 때, 만일 이것이 바울의 선교사역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제외하고는 여러 해가 지날 때까지 유대교회와의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행 9:19-31).

따라서 이 문장은 문법적으로 조금 어색하므로, 이렇게 이해하면 좋을 줄로 생각된다: “다메섹과 유대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지방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김경진 교수<백석대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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