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71강)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상태바
사도행전(71강)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 운영자
  • 승인 2010.06.01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바울

천부장의 본의 아닌 호의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행 23.1-11).

바울은 자신이 이제까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함으로써 연설을 시작하였다. 즉 자신이 이방인 선교라는 소명에 순종했음을 말하였다(참고, 행 26.19-20).

그 때 그 모임을 주도하고 있던 대제사장은 바울의 선교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란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즉시 그런 명령을 내린 대제사장을 “회칠한 담”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때 곁에 섰던 사람이 그가 대제사장임을 밝히자(“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의 어조는 급히 바뀌어 사과하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 바울의 입을 치라는 대제사장을 비난한 다음에 나온 이 질문은 안나스 앞에서의 예수님의 재판 모습을 상기시킨다(요 18.22).
이로써 우리는 누가가 그의 두 권의 책에서 예수님의 재판과 바울의 재판 사이의 평행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누가는 예루살렘으로의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 중에 일어난 사건들이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이것은 주님이 친히 택한 사도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고 있다는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한 구도라고 생각된다. 바울의 사과의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의 시력이 대단히 좋지 못하여(참고, 갈 4.15; 6.11) 사회하는 이가 대제사장인 줄을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어떤 경우에는 공회의 사회를 다른 사람이 주관했기 때문에 바울이 사회하는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분간하지 못했을 수 있다.

셋째, 바울은 그런 상황 아래에서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것을 인정하기를 원치 않았을 수가 있다.

넷째, 바울이 일종의 풍자를 사용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참 대제사장이라면 그런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아마도 아나니아가 내린 명령이 그가 대표하고 있는 유대법에 어긋나므로 그가 대제사장인 줄을 알지 못했을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의 분노는 아나니아가 지시한 불법적 명령 때문이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이 재판도 받기 전에 유죄인 것으로 판단하고 처벌을 명함으로써 유대법을 어겼던 것이다(참고, 신 19.15).

그때 바울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임을 알고는, 논쟁의 초점을 좀 더 무거운 신학적 문제, 즉 죽은 사람의 부활의 문제로 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사실 산헤드린 공회원들끼리 논쟁하도록 만드는 것 이상의 일을 의도하고 있었다. 즉 여기서 제기된 소망과 부활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그가 변명하는 동안 내내 (심지어 그의 변명이 더 이상 논쟁을 일으키지 않을 때조차도)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참고, 24.15, 21; 28.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부활 교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들과, 그것을 인정하는 바리새인들 사이의 토론을 야기시켰다.

알다시피,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는데, 그곳에는 부활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죽은 사람들(복수임에 유의하라.)의 최후의 종말론적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여기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한 종파(바리새파)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고자 애쓰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좀 더 명백한 주장을 펴기 위한 토대를 놓고자 했던 것이다(26.23).

결과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빌라도, 헤롯, 십자가 우편의 회개한 강도, 백부장 등이 예수님의 결백을 선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눅 23장), 바울의 결백을 선언하게 되었다(23.9). 산헤드린 공회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혼합체임을 간파한 바울의 갑작스런 통찰력은 주님이 약속한 능력의 한 예로 볼 수 있다(막 13.9-11).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때문에 공격을 받을 때 우리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항상 우리의 믿음을 제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성령님은 우리가 바울처럼 예리한 통찰력으로 지혜롭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지혜를 주실 것이다.     
                                                                                          김경진 교수
<백석대 신약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