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때 안 죽고 살아남은 죄 갚으며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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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때 안 죽고 살아남은 죄 갚으며 살아”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0.05.13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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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5.18 30주년 기획2 - 민주화운동 거목 강신석 원로목사 인터뷰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자 사건의 진상을 누구보다 크게 외쳤던 강신석 원로목사(광주무진교회)는 최근 본지가 확보한 증언 자료에서 “교회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며 “5.18 당시 부상자나 고통 받는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너무 성서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 5.18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간직하고 그 진상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불리는 강신석 목사는 지난 2003년부터 1년간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사진제공 5.18기념재단
5.18기념재단에서 발간한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5.18의 기억과 역사'에서 강 목사는 “1980년 5.18 그 상황을 보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사는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느냐. 도대체 길거리에서 무참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나자빠지고, 그러고도 그 놈들이 대통령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군사정부는 광주5.18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언론을 탄압하고 생존자들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강신석 목사는 5.18 알리기에 온 열정을 쏟았다. 그는 사건 직후 캐나다 선교사의 집에서 도피생활을 하다가 미국, 오스트리아, 영국 등 주한외국대사들을 만나 5.18의 진상을 알렸다.

이후 정보당국에 채포돼 조사와 재판을 받고 40여일 만에 풀려났다. 그 후에도 그는 5.18과 관련된 서신과 자료를 독일, 캐나다, 영국 등 서방국가에 보냈다. 실제로 독일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강 목사는 “굉장히 많은 자료들이 내 손을 통해 나갔다. 삐라까지 복사해서 보냈다”고 밝히고 “내 영향을 받고 운동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살아남은 내가 그것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 사람들은 놀라운 사람들이다. 정수만 회장(5.18민주유공자회) 재판을 위해 모금하러 다닐 때 한 번도 거절 당해본 기억이 없다. 많건 적건 다 조금씩이라도 도와줬다”며 “군사정부가 감시하는 속에서 돈을 주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앞당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전국화와 세계화의 과제를 남기고 있다. 또한 한국 교회의 5.18 관련 활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반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는 “그 죽은 사람들의 핏값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갚지 않고서는 눈 감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역사의 방향은 민주화라고 분명히 설정돼 있는데 그것을 역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 희생을 각오하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화가 앞당겨졌다.”고 5.18의 의미를 부여했다.

강 목사는 이어 “역사는 우연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 5.18은 역사적인 맥락과 같이 하는 것”이라며 “군사독재를 종식시키는 힘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잠재해 있다가 5.18을 통해 폭발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5.18 하면 아픈 기억 밖에 없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지금은 눈물 밖에 남은 게 없다”며 “그때를 다시 떠올리면 또 심장이 뛴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목사는 교회,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고 몸담고 있는 광주, 더 나아가 한국이라는 사회 속의 문제를 어떻게 같이 공유하고 해결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며 “5.18 항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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