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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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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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3.3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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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엽 목사<기독교정화운동 대표>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행사와 계획들을 내놓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갸륵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부활절의 뜻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바울은 부활에 관한 일을 생각하면서 부활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을 경험해 보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부활을 경험하려면 먼저 죽음이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3:10-12)고 한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요 환희의 기쁨이며 소생과 생명의 분출이다. 만물의 새로운 시작이며 솟음이다. 그러나 이가 오기 전에 먼저 죽음이라는 반갑지 않은 터널이 있다. 죽음의 터널! 이를 누가 먼저 감당하겠는가?

우리가 먼저 감당하며 내가 먼저 감당해야 한다. 그런고로 부활절은 일종의 죽음의 절기이기도 하다. 부활절의 감사와 축하를 행사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죽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절 축하의 뜻이다.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는 대한의 교회여! 우리는 먼저 죽음의 경험부터 하자.

교회 안에서 화염 분사기를 쏘아대며 심지어는 분뇨를 퍼다 붓고 목사들이 싸우면서 어떻게 부활절을 맞이한단 말인가? 불신자들이 우리를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한편 생각하면 부활 자체가 우리에게는 신앙의 생활적 의미에서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부활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시켜 생활화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죽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내가 먼저 죽지 않고는 부활을 내면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부활을 연습하자. 이 연습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일부터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곧 내 앞에 계시다. “내가 세상 끝날 때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에 그 분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무 강해서, 내가 너무 억세어서 그 분은 무시 당한다. 그리고 탄식한다.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나를 생각도 하지 않는구나! 만일 나를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시면서 괴로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때로는 너무 바빠서 그 분을 생각지 않는다. 너무 복잡해서 너무 일이 커서 때로는 이익이 너무 크고 권력자들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도 부활절을 바삐 축하한다. 예수께서 어떻게 생각 하실까?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너무 커서 주님을 삼켜버린다고 탄식하시지 않으셨던가?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삼켜버린다. 예수님을 잡아 먹으면서 그것이 부활절 감사 행사라고 떠들지는 않는가?

우리는 날마다 부활을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그러면서 아직도 이루려면 멀었다고 탄식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우리는 바울의 겸손을 배워야 한다. 바울 같은 분들이 아직도 덜 죽어 부활에 이르려면 멀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다 이룬 것처럼 천하에 떠들고 광포 하다니! 우리는 좀더 겸손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

우리에게서 부활절이 빛나려면 좀더 깊은 골방의 훈련이 필요하다. 진정한 부활이 우리의 축하가 되고 환희가 되려면 그의 부활을 내면화하고 생활에서부터 연습해야 한다. 부활의 내면화 연습 및 생활화가 바로 부활절을 크게 맞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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