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19강) 불법자와 동류가 되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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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19강) 불법자와 동류가 되신 주님
  • 승인 2008.09.2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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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주변 사람들의 반응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 종교 지도자들, 군병들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이 불쌍한 존재가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메시야일 것이란 주장을 조롱하였다(눅 23:32-38). 당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비방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율법의 기록 때문이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의하면(“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이고, 그렇다면 주님은 분명 구약 율법에 의하면 저주 받은 자인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결코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35절), 그렇게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자들로 간주하며 핍박하게 되었던 것이다(참고, 갈 1:13-14). 한편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 신 21:23을 인용하되 그것을 주님이 인류를 위해 받으신 저주로 해석하고 있다(갈 3:13).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비방한 사람들 중 행악자 한 명은 주님의 편에 서서 나중에는 구원을 요청하였다(42절). 여기서 누가는 마가복음의 강도라는 용어 대신 행악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강도(lestai)는 열심당과 같은 정치범이나 저항 운동가를 가리키는 데 반해 행악자(kakougoi, evil-doer)는 실제적인 범죄자를 가리킨다.

이는 아마도 누가가 주님과 함께 처형된 자들이 혁명가나 반란자와 같은 정치적인 죄인이 아니라 시장과 거리에서 죄악을 일삼는 노상 강도(bandit), 즉 비천한 부류의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행악자는 바로 주님이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람들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메시야가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눅 22:37, 사 53:12)는 예언의 성취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행악자의 구원 요청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미래의 왕국으로부터 현재의 승귀(昇貴)로 우리의 초점을 바꾸어놓는다(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행악자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등극하는 미래의 왕국,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출현을 기대하며, 그 때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간구한 것인데, 주님은 “오늘”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이를 현재적 실재로서 답변하심으로써 미래의 왕국이 지금 이뤄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곧 누가의 현재적 종말론을 여실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참고, 눅 11:20; 17:20, 21). 이것은 또한 주님이 나사렛에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 메시야 시대를 예언한 이사야 61장 1-2절을 인용하면서 선포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즉 주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에 예언되었던 메시야 시대가 바야흐로 개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누가복음에 다가올 미래의 종말론을 가리키는 표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눅 18:17, 25), 임박한 종말론이나 핍박 혹은 환난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갑작스런 종말에 대한 예언 또한 등장함으로 여전히 말세를 사는 종말론적 긴장이 유효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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