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107강) 이웃을 섬기는 봉사적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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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07강) 이웃을 섬기는 봉사적 기독론
  • 승인 2008.06.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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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로서의 주님




성만찬 다음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누가복음은 마가, 마태복음과는 달리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나눈 대화가 제시되어 있다(눅 22:24-27).


그 내용은 제자들이 서로 자리다툼을 하자 주님이 자신을 섬기는 자로 소개하면서 겸손을 가르친다는 것이다(눅 22:27)



사실 누가복음의 이 기사는 마가, 마태복음에서는 성만찬 좌석이 아닌 곳에서, 즉 예루살렘 입성 전에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막 10:41-45; 마 20:24-28), 누가복음에서는 성만찬 후 그 좌석에서 발생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순서상의 차이와 함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차이는 내용상의 차이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님이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서 소개되는 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생략되는 대신 다른 내용, 즉 “섬기는 자”란 표현이 추가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눅 22:27). 그러면 과연 이런 차이를 통하여 누가는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먼저 마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묘사는 핍박과 고난에 직면한 마가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저술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마가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마가가 묘사하는 기독론과의 연관성을 확인시켜 준다.

요컨대, 마가는 자신의 공동체의 특별한 사회적 상황으로 인하여 그 상황에 적합한 기독론 이미지를 창출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구원론적 기독론 모티프는 마가공동체와는 다른 사회적 상황에 놓인 누가공동체에게는 다른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물론 누가복음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견해가 획일적이지 않은 까닭에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임박한 종말이 연기된 상태에서 핍박이나 박해에 직면하고 있지 않은 상황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상이한 상황은 예수님에 대한 누가의 이해에 반영되면서, 눅 22:27 역시 그런 맥락에서 기록된 것이다.

요컨대 임박한 종말이 예상되지 않고 직접적인 박해나 핍박이 없는 상황에서 이해된 기독론은, 임박한 종말과 수난이 현실적인 문제로 당면해 있는 마가공동체의 상황에서 이해된 기독론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그로 인해 누가복음에서는 마가복음의 고난과 결부된 구속적 기독론보다는 공동체 내부의 삶, 즉 구성원들 사이의 윤리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회구원적 (혹은 봉사적) 기독론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인해 누가는 막 10:45을 생략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님”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독론하면 거의 일방적으로 구원론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누가복음에서 소개되는 주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는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를 종처럼 받들어 섬기는 겸손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봉사적 기독론은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기는 주님의 헌신적 사랑에서 다시금 확인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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