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죽음보다 ‘삶’에 대해 더 많은 관심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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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죽음보다 ‘삶’에 대해 더 많은 관심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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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9.2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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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민교수<웨스트민스트신대 구약학>


구약성경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다섯 명 등장한다. 삼손(삿 16장), 사울과 사울의 무기당번(삼상 31장; 대상 10장), 아히도벨(삼하 17장), 시므리(왕상 16장)다.

삼손의 자살은 그의 자살에 대한 평가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자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는 것이 기독교의 일반적인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자살했다고 볼 수 있는 삼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드물다는 것은 흥미롭다.

다시 말해 다른 자살의 경우들과 달리 삼손의 죽음은 잘 비난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삼손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나 살펴볼 필요가 있을 정도다.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삼손의 경우는 예외로 취급하곤 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은 사울이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꺼려 자신의 무기당번 병사에게 자신을 찔러 죽게 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그 병사가 그 명을 실행하지 않자 사울은 스스로 칼 위에 엎드려 죽는다. 그리고 무기당번 역시 같은 방법으로 죽는다.

삼손과 사울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좀 더 정확한 계량적이고 문헌적인 조사가 있어야 하지만 일반적인 인상은 삼손의 ‘자살’이 사울의 ‘자살’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만한 근거가 본문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사무엘하 1장은 사울의 죽음을 깊이 애곡하며 그의 생애를 칭송한다. 반면 삼손의 경우,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살았을 때 죽인 사람보다 많았다”는 평가는 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인지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인지 애매해 보인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죽음은 좋지 못한 자살의 예로, 삼손의 죽음은 영웅적인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에 근거했다기 보다 사울과 삼손이라는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호불호에 근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타고 거기에서 떠나 자기의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그는 집안일을 정리한 뒤에, 목을 매어서 죽었다. 그는 이렇게 죽어서 자기 아버지의 무덤에 묻혔다.

이스라엘 왕 시므리는 성읍이 함락될 것을 알고는 왕궁의 요새로 들어가서 그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도 불에 타 죽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섯 사람의 자살을 살펴봤다. 본문을 살필 때 기대했던 것은 그 자살들에 대한 비교적 명시적인 평가들이었다.

그러나 본문은 자살을 어떤 신학적 성찰이 필요한 사건들이라기 보다 그냥 인간사에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담대히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직접적인 자살을 다룬 경우 그 자살 행위 자체에 대한 본문은 명백한 가치 판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죽음 그 자체 보다는 삶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는 듯 하다(사울의 죽음).

또한 어떤 죽임이 자살인지 아닌지를 기술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즉,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주변의 도움을 얻는 것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작업일 수도 있어 보인다.

자살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으로 여기면 논의를 진행할 수는 있으나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치밀한 해석학적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전쟁에서의 살인과 자살의 비교). 구약의 여러 인물들은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경험을 했으며, 이것은 자살을 원하게 되는 상황이 우리 인간의 삶에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고도 신앙과 소명을 지킨 이야기에서는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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