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 사회에서 선구자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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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 사회에서 선구자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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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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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연경교수<안양대학교, 신약학>


십자가, 곧 예수께서 자기 몸을 드려 이루신 제사는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이를 두고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하신 성령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갈 3:13-14).

로마서에서는 생명의 성령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8:1-4). 이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죄의 종으로 살던 삶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의의 종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약속, 복음의 약속이다.

내 죄를 용서해준다는 말은 쉽다. 그런데 나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부담스럽다. 우리의 현실은 약속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100세라는 아브라함의 늙은 나이는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능력을 가진 분임을 알았던 것이다(롬 4:17).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제사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제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여 예수께 순종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이 잘 믿기지 않는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서 타협한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할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내가 계속 짓는 죄나 사해주는 것이 복음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으로만 만족하고 싶어한다.

이런 태도를 복음의 ‘하향평준화’라고 부를 수 있다. 제대로 못하니까 안 해도 되는 쪽으로 복음을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것을 ‘은혜’라는 말로 부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바울의 글에서도 그런 생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순종의 열매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장 자주 경고하는 사람이 바울이었다(고전 6:9-10; 갈 5:21; 엡 5:5 등). 그래서 히브리서도 거듭거듭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반복한다.

오히려 복음은 참된 순종의 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를 순종케 하시는 예수, 곧 선구자 그리스도의 그림을 보여준다. 우리 죄를 대속하는 예수 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선구자 예수, 우리를 용서하는 예수 뿐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이다.

내가 당당하게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내가 어려움 속에서도 순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앞서서 걸어가신 선구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분의 뒤를 따라 기쁨과 감사와 인내함으로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복종하며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죄를 속하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리 앞서 걸어가신 선구자적 여정의 절정이기도 했다. 갈보리는 죄 용서를 인해 감격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힘을 내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결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십자가는 내 죄인 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온전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선구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나와 같이 시험당하고, 나와 같이 힘겨워하셨던, 그러나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이제 내 손을 잡고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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