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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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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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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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목사<의왕중앙교회>

태국의 한 동물원을 관람하면서 몰려오는 슬픔에 분노를 느끼며, 인간들의 묘한 심리가 역겨웠던 적이 있었다.

송아지만한 동물의 왕, 시베리아호랑이가 돼지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어미돼지가 거만하게 누어 감히 호랑이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호랑이와 돼지가 한 우리 안에 사이좋게 친구가 되어(?) 지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느낀 내 심중의 한 단면이다.

호랑이가 맹호로서의 야성을 빼앗기고 잃어버려 돼지가 된 것이었고, 돼지는 정신 줄을 놓아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가져야 할 맹호 앞에서 미친 짓(?)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하게 병든(?) 두 동물의 어이없는 동거를 보면서 짙은 감탄과 감동에 젖는 이들과 함께 감탄하고 감동해야 할 것인데 감동하지 못하고 감탄하지 못하는 내가 오히려 무엇엔가 병든 것이 아닌가 하는 사고(思考)의 외로움을 경험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왜, 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광경을 보며, 신기함이나 감탄보다 분노와 역겨움에 몸이 떨리는 것일까?

이 모양새에서 병든 한국교회의 모습이 순간 투영(透映)됐기 때문이었다. 더 진실하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시대의 목양의 사명자로서 본성을 잃어버린 채, 오늘을 사는 내 모습의 실상을 보고 느끼는 현기증이었다.

한 우리 안에 같이 뒹구는 그 호랑이와 돼지의 정체성을 그 무엇이 빼앗아갔을까?

사육사의 모진 매였을까, 뒤틀린 음식이었을까, 새끼 적부터 베인 습관일까,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하는 어떤 마약 같은 약물이었을까.

마귀는 마태복음 6장24절(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에서 인격을 부여받은 맘몬(Mammon)을 사용하여 호랑이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빼앗고, 사명을 망각시켜 순하게 길들여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는 어느 사이에 길들여졌다. 한국교회가 본질적으로 전투하는 이 땅의 교회로서의 ‘야성(野性)’을 빼앗긴 채 호랑이와 돼지가 동무가 되고, 이웃이 되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한가!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 산들 어떠한가 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야성이 넘치는 호랑이 한국교회가 우리(cage) 안에 갇혀 그럴듯하게 포호의 일성을 발하는 것 같아 밀림이 그리워 우는 몸부림으로 보고, 우리를 열어 밖으로 내놓으면 우리를 되찾아 기어들어가려하는 길들여진 강아지형국처럼 되어버렸으니, 누가 그 겁에 질린 포효를 듣고 놀라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잰걸음의 걸음걸이에 경외와 두려움과 존경을 보내겠는가.

교회 밖 세상에서는 이미 호랑이가 아니다. 한 귀퉁이로 밀려나 주눅 든 채,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형국이다.

죄의 사슬에 메여 죽어가는 영혼, 병든 세상, 부조리한 사회에 도전하여 십자가의 복음으로 영혼을 살리고,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용기와 비전을 찾을 길이 없고, 있다 해도 세상이 오히려 호랑이를 걱정하는 지경이다.

성경에서 진짜 호랑이의 포호와 야생의 진짜호랑이의 행보를 한번 보자.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엘리야, 느헤미야, 다니엘, 아모스 같은 인물들의 삶과 외침은 말 그대로 야성미가 넘치는 매력과 정열과 비전의 인물들이었다. 또 세례요한과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사도행전의 주역들과 초대교회를 세우고 불태우는 성령의 사람들에게서 사명의 야성이 느껴지지 아니하는가.

산천초목이 울고 떨도록, 세상이란 밀림 속을 복음으로 포효하며, 종횡무진 하는 호랑이나 사자의 야성으로 세상을 정복해가도록 교두보를 마련하여 우리에게 바통을 넘겨준 그들의 삶과 외침과 주눅 들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사표가 되었던 성경과 성경 속, 그리고 성경의 사람들을 보자.

사탄이 입에 물려준 당근을 즐기고, 때로는 그것을 애써 지키며, 빼앗기지 않고 불려보려다 어느새 돼지와 구별이 되지 않는 무늬만 호랑이가 되어버린 나와 우리네 형국을 보면서 어찌 웃고, 감탄하며, 비지감이 누워 돼지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폭 넓고, 온유한 그 호랑이를 감히 동정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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