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아닌 진정한 봉사의 삶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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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아닌 진정한 봉사의 삶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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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1.2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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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생목사<한국교회봉사단 사무처장>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계속해서 섬김과 봉사가 교계의 화두가 될 전망이다.

성서와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는 성서신학과 역사신학적인 관점,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이라는 기독교윤리, 그리고 기독교가 처해있는 성장과 선교의 절박한 현실 타개책으로든 간에 우리사회는 희생과 손해를 전제하는 섬김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그 이유는 우리사회가 이전보다는 많이 복지사회로 진입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제도적인 사회보장의 한계로 말미암아 민간 영역에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소외된 이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섬김의 대상이 되는 복지사각지대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하여금 섬기고 봉사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필요에 우리나라의 65,000여 교회는 참으로 다양하게 긍휼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개입과 참여를 제외한 복지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많은 양의 복지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봉사를 삶으로 살려고 하기 보다는 프로그램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삶으로가 아닌 특별한 이벤트로 생각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생활이 아니라 일회적인 행사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발상은 자칫 자선으로 베풀고 동정하는 시혜자로서의 자리에 교회를 자리매김 한다.

이럴 경우 대체로 수혜자는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제공자인 교회가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선택하게 된다. 봉사의 시간과 장소 및 선물의 선정이나 나눔의 과정, 순서지와 현수막 그리고 사진촬영이나 언론보도와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제공자 중심으로 짜여지게 된다.

수요자인 소외된 이웃이 가지게 될 불편함과 부담 곧 자존감과 낙인감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치부된다. 장시간 앉아 떨게 될 실외 행사에서조차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대상자들에 대한 고려는 늘 마지막에나 있을 뿐이다.

잠시 주님의 행적을 살펴보자. 한 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주님이 먼저 찾아 나섰다. 병자와 귀신들린 자, 나아가 우물가의 여인이나 삭개오에게 다가가 그의 필요를 물으셨다. 병든 자에게는 병을 치유해 주셨고, 귀신들린 자에게는 귀신을 좇아 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며 공로를 돌리기 일쑤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집하는 이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신다.

이렇듯 주님의 공생애 사역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이셨다. 주님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으며, 그들의 욕구와 필요에 일일이 맞추어 ‘맞춤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성과물은 하나님과 당사자에게 돌리고 사회에 복귀하여 하나님 중심으로 성실하게 살 것을 한결같이 요구하고 계신다.

섬김의 주님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에서, 섬김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임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섬김의 결론은 칭찬과 박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섬김의 프로그램으로 잠시 교회를 박수의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김의 결과물이 칭찬과 박수라면 그것은 바람직한 섬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봉사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으로 봉사가 자리잡을 때 한국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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