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62) 종말은 심판과 분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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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62) 종말은 심판과 분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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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1.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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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적

<김경진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종말론 강화의 두 번째 부분(마 24:6-8, 29-41)은 주님의 날의 도래와 그 이전에 발생할 사건들에 대한 묘사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읽게 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34절에 의하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정작 36절에 의하면 그 날과 그 때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예언을 듣는 청중들의 생전에 주님의 날이 올 줄로 잘못 생각하였다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주님의 예언이 틀렸다는 것인데, 주님이 이와 같은 중요한 영적 진리에 대하여 실수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막 9:1과 함께 이 말씀을 고려할 때,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한 것을 사람들이 재림과 동일시한 까닭에 이러한 오해가 빚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 반드시 재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대체로 학자들이 막 9:1의 말씀을 오순절 날 발생한 성령 강림 사건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33절의 “이 일”(“이 모든 일,” 33절)이 24장 예언의 전반부에 묘사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확실히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주님 말씀 후 약 40년 만에 정확하게 성취되었으며, 그리고 다가올 최후의 종말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과 기대 가운데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나무는 잎을 잃어버리는 유일한 나무이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가 잎을 잃는다는 것은 여름이 다가왔다는 징조인 것이다. 여름은 유대인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대한 상징인데, 그 이유는 팔레스타인에서 추수는 가을이 아니라 여름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에서 행한 주님의 사역은 마치 무화과나무의 잎처럼 예루살렘의 종말에 대한 예언적 사역이었던 것이다(마 24:32-33).

제 다가올 종말에 대하여 주님 자신이 재림의 날과 그 때를 모른다고 말씀하였는데(마 24:36), 만일 어느 누가 그것을 안다면 주장한다면, 그것은 신성모독과도 같은 짓이 될 것이다.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무모한 추측이 아니라 깨어 준비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노아 홍수 전 사람들처럼 세상일에 깊이 몰두한 나머지 영적 세계의 일을 등한시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38-39절).

마지막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은 심판과 분리의 날이 될 것이다(40-41절). 그런데 만일 예비하고 있지 않는다면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는 일일 것이다. 마지막 날에 영원한 고통에 빠지게 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말은 역사적이고 우주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 내일은 어쩌면 우리의 시간이 아닐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말의 날은 우리의 의무(사명)를 등한시한 것에 대한 심판과 한결같은 충성에 대한 보상의 시간이 될 것이다(45-51절). 지금 우리는 과연 종말을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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