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복음서(50) 무화과나무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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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50) 무화과나무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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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0.12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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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없는 신앙에 대한 책망
 

베다니에 머물고 있던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올라가는 길에 무화과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에 열매가 없음을 보고 저주하자 곧 시들어 죽게 만들었다(마 21:18-22).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즉시 시들지 않고 그 다음날 시든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성전 정화사건이 삽입되어 등장한다(막 11:12-25). 한편 누가복음은 이에 해당하는 병행 기사가 없는 대신에 3년 간 실과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비유가 등장한다(눅 13:6-9).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일년에 두 번 열매를 맺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 시기, 즉 4월경에 아직 잎사귀가 없는 상태에서 지난해에 움튼 것이 자라게 되는데, 파김(paggim)이라 부르는 이 열매 싹이 점점 자라서 6월경이 되면 잎사귀와 꽃과 열매가 동시에 함께 온전히 자라게 되어 수확하게 된다. 그러나 정상적으로는 보통 봄이 움이 트고 자라서 8월부터 10월 사이에 열매를 거두게 된다.

유월절이 4월 15일이라면 이 사건은 약 일주일 전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난 해 움튼 열매 싹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경우 특이하게 잎사귀가 무성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음으로 주님은 저주하여 시들게 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이 행동은 결국 무성한 잎사귀와 함께 있어야 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아 더 이상 쓸모없음으로 존재가치가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사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이 행동은 이 사건에 앞서 발생한 성전정화 사건과 연결되고 있다. 즉 겉으로 볼 때 휘황찬란하며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전이었지만 그 안에 벌어지는 상행위(商行爲)는 성전에 합당한 열매가 아니었고, 따라서 제 기능을 못하는 성전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샌드위치 구조 속에 담아 표현하여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제 기능을 못하는 성전을 대조시킴으로써, 이 진리를 더욱 극명하게 표현하였다.

사실 성전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그 민족으로부터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의 목적이 되는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다. 따라서 제 역할을 다 못한 유대 민족 역시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행함 없는 신앙은 책망을 받는다는 것이다. 저주 받은 나무는 잎사귀가 있었는데,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열매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매가 발견되지 않자 결국 저주 받게 된 것이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을 믿노라고 자부하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였고, 따라서 그 민족은 결국 저주를 받아 온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고 역사는 말한다.

신앙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 초래하는 비극인 것이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보다 잘 드러나고 있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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