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국내 성지순례(14) -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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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국내 성지순례(14) -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 현승미
  • 승인 2005.07.2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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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3.1운동에 주동적 역할

숭일학교는 1906년 광주선교부 벨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남자 1명, 여자 3명 4명으로 첫 문을 열었다. 점점 학생이 많아지자 남학교는 1908년 2월 대한제국으로부터 숭일학교로 인가를 받고 초대교장에 프레스톤(J. F. Preston, 변호한), 여학교 역시 1908년 광주여학교(후에 수피아여학교)로 인가 받았으며 초대교장은 그래함(E. I. Graham, 엄언하) 선교사였다.


광주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경우 숭일학교는 최병룬 교사가 학생 동원을 맡았으며 수피아여학교는 홍승애 교사가 각각 학생을 동원하여 준비된 태극기 여섯 가마니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 일경에 체포된 수만도 1백 명이 넘었으며, 수피아여학교 학생 김양순은 총검을 들이대는 일본헌병을 향해서 “쏠테면 쏘아라”를 외치며 용감하게 항의하였다. 숭일학교 송광준은 일경에 체포되어 10월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그의 시신이 오던 날 학생들은 호남선 송정리 역까지 나가 시신을 운구하여 숭일학교 지하에 안치해 두자 일경이 시신을 압수해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송광준열사 시신을 내놓으라”면서 다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후 두 남녀학교 학생들은 항상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으며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39년 스스로 폐교했다.


해방이 되자 숭일학교는 1945년 11월 21일, 수피아여학교는 1945년 12월 5일 각각 복교를 하였다.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는 양림동 옛 교사자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숭일중고등학교는 양림동 교사를 매각하고 1993년 칠봉산 기슭에 초현대식 교사를 완성하고 이전했다.


<성지순례 문의:2230-5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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