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권원호 전도사 윤치호의 맏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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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권원호 전도사 윤치호의 맏사위
  • 승인 2004.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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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극심 지역교회에 부임 자처

평안도 출신으로 장로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 성경적 신앙과 애국신앙으로 다듬어진 권원호 전도사는 일제폭압에 맞서 버티다가 옥중 순교한 교역자이다. 대부분 교역자들이 목사라는 신분을 유지했던 것과 달리 그는 전도사로서 설교가요, 민족운동가로서 교회사 속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신앙일생 중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1939년 5월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3부합동연회. 이 회의에서 권원호전도사는 일제의 탄압이 가장 심하다는 회양읍교회로 부임을 자처하고 나섰다고 한다. 회양읍교회는 이봉운 전도사가 사역하다가 일제의 극심한 신앙탄압을 견디다 못해 떠난 교회로 권 전도사는 이 탄압지역 선교를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권 전도사는 부임 이후 줄 곧 심방과 전도를 계속하며 일제의 반대를 무시하였고, 금강산 온정리 기독교수양관에서 열린 원산지방 교역자수양회에도 다녀올 만큼 폭넓은 사역을 전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일경은 고의적으로 신사참배를 권 전도사에게 강요했다고 한다. 하지만 권 전도사는 조금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고 묵살, 결국 구속되기에 이른다. ‘비행기태우기’ ‘물먹이기’등 악랄한 고문을 받은 권 전도사는 옥 밖에서 성도들이 “대충 타협하고 나오라”고 부탁했지만 “믿음으로 승리하라”며 신도들을 오히려 책망, 끝내 신앙지조를 버리지 않은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1942년 1월2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고를 치루는 과정에서 옥중 선교를 했다는 혐의로 다시 기소돼 1943년 11월10일에는 불경죄까지 붙어 1년을 추가로 구금당했다. 일제는 권 전도사를 독방에 가두며 고문을 하였고, 배식도 극소량만 주어 목숨만 붙어 있도록 악랄하게 대우했다고 한다. 오랜 고문과 영양부족으로 몸조차 움직이지 못하게된 권 전도사는 1944년 4월13일 조국의 독립을 불과 1여년 남기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권원호 전도사는 당시 독립진영의 지도자이면서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개화운동을 진두지휘하던 윤치호의 장녀 윤순덕 여사와 20세에 결혼했다. 윤치호가 권 전도사의 기개를 얼마나 인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 땅에서 영원히 떠나갔다. 그러나 그의 굽힐줄 모르는 굳센 신앙과 나라와 겨레를 뜨겁게 사랑하던 정신은 이 민족의 가슴에 도도히 흐를 것이다. <윤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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